창세기 스케치 - 제 6 장

제 6 장

지상에서의 두 노선 (1)

-먼저는 육이고 그 다음은 신령한 것

지상에서의 두 노선

가인과 아벨 이후부터 지상에서는 두 노선이 시작되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 있는 ‘생명노선’이고, 또 하나는 사탄의 제압 가운데에 있는 ‘자아와 세상에 속한 노선’이다. 이는 마치 에덴 동산 가운데에 생명나무와 선악지식나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는 것과 같다. 사람이 에덴 동산에서 생명나무를 선택하지 않으면 선악지식나무를 선택하게 되어있다. 다른 선택은 없다. 이는 우리가 생명나무 안에 있는 동안에 선악지식나무 안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선악지식 안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오직 생명 안에 있어야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가인과 아벨 이후부터 나타난 두 노선 중, 하나의 노선은 선악지식나무로 대표하고, 또 다른 하나의 노선은 생명나무로 대표한다. 이 두 노선의 구체적인 내용은 창세기 4장과 5장 안에 담겨 있다. 4장은 우리에게 두 노선의 산출을 보여주고, 5장에서는 우리에게 생명노선의 실제를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 두 종류의 봉사

4장에서 우리에게 두 종류의 봉사를 보여준다. 하나는 생명 안에서의 봉사ㅡ 아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선악지식 안에서 산출한 봉사ㅡ 가인이다. 이 두 종류의 봉사는 에덴 동산에 있는 두 나무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가인이 행한 봉사의 결과는 하나님에 의해 쫓겨났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에덴 동편에서 살아야 했다 (창4:16). 창세기 3장 끝에서는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창3:24). 우리는 에덴 동산 동편이 바로 생명나무로 통하는 길목이며,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인은 바로 에덴 동산 동편 놋 땅에 살았다.

‘놋’은 유리(流離)란 뜻이다. 가인은 에덴 동산 동편에서 유리하면서 여호와의 낯을 다시 뵐 기회를 기다렸다는 것은,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을 때에 그는 “내 죄가 너무 중하여 사면을 얻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창4:13, 원문에 의해  번역). 그는 사면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알고 있었으며, 언젠가는 다시금 하나님의 낯을 뵐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가인은 여기에서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을 대표한다.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생명나무 밖에서 유리하면서 마음도 쓰고, 소망도 갖지만, 그러나 생명의 실제가 없을 뿐더러 하나님의 낯을 뵐 수가 없다. 우

리가 참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즉시 종교 안으로 떨어질 수 있다. 하나님 옆에서 유리하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살 수 없게 된다.

훗날 가인이 아들을 낳은 후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다. 가인은 가정을 이룬 후로 부터 다시 유리하지 않고, 한 성을 쌓고 (창4:17) 살았다. ‘성’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종국(終局)을 가르키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은 한 성을 얻는 데에 있으시기 때문이다. 참으로 기묘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을 바라셨는데, 그러나 성을 제일 먼저 쌓은 사람이 가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판한 사람이 제일 먼저 성을 쌓았던 것이다.

먼저는 육이고 그 다음은 신령한 것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의 신령한 견해로 이 세대의 조류 (潮流)를 볼 수 있는지를 묻고 싶다. 세대의 조류는 처음 사탄으로 부터  발단되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신령한 시각으로 이 세대의 조류를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 조류 가운데서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주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매번 하나님의 움직이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예비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 역사와 인류 역사 속의 한 세대 한 세대의 발자취를 관찰해 보게 되면, 우리는 한 줄기의 조류가 줄기차게 앞으로 매진(邁進)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로마 제국의 통일에서 교회가 형식상으로 합일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르네상스(문예 부흥) 이후 마틴 루터가 성경 읽는 자유와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진리를 회복한 것도 볼 수 있으며, 이어서 사악한 세대의 사람들로 인해 전통의 속박을 타파, 많은 의문과 규례로 부터 해방을 받게 하고, 전체 사회의 형태를 변케한 것들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후‘사람’의 가치가 인정을 받게 되고, 이성 주의와 인문 철학이 잇달아 탄생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안목을 넓혀서 멀리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럴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 세대에게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성을 원하신다. 그러나 첫번째의 성은 하나님의 낯으로부터 떠난 사람이 쌓았다. 이는 참 기이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당신은 성경에 이 두 노선에 각각 두 사람의 에녹, 두 사람의 라멕, 한명의 므두셀라, 한명의 므드사엘, 한명의 게난 그리고 한명의 가인(같은 얻음이라는 뜻임)을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이들 모두가 자아와 세상에 속한 노선에 먼저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생명 노선에서 예비하시고, 필요로 하시는 것들은 사탄이 자아와 세상에 속한 노선에서 미리 준비해 놓았다. 이는 참으로 기이하다. 하나님께서 매번 일을 하실 때 마다 사탄이 먼저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고리도전서 15장 46절은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이 두 노선이 하나는 죄악의 노선, 또 하나는 선(善)한 노선 이므로 단번에 분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지 않다. 이 두 노선을 밖에서 볼 때는 거의 비슷하다. 당신에게 하나의 에녹이 있고, 나에게도 하나의 에녹이 있다. 당신에게 하나의 라멕이 있고, 나에게도 하나의 라멕이 있다. 당신에게 하나의 므두셀라가 있고, 나에게는 하나의 므드사엘이 있다. 당신에게 하나의 게난이 있고, 나에게는 하나의 가인이 있다. 만일 당신이 옳고 그름만을 보게 된다면 필시 혼동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선 악이 없고, 오직 생명만이 있을 뿐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다만 생명이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영원히 다시는 선악지식나무를 만지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오직 생명나무를 누리는 것만을 허락하셨다. 찬송을 유행가의 곡에 실어 부르면 무엇이 잘못인가?  오직 생명만을 공급할 수 있다면 좋은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다시금 머리와 옷 입는 것에 비평하고 판단을 한다면 당신은 종교 안에 그리고 자아의 노선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오직 생명만을 주의하도록 하신다. 사람이 생명을 만지게 되면, 그는 자연히 변케 된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다만 생명만을 주의하며, 생명나무 안에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에녹 성에 수금과 퉁소가 없었다면 오늘날 찬송이 있을까?  또한 노래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릴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아주 단순히 생명나무 안에 살아가고, 신령한 통찰력을 가질 때 우리는 사탄의 행실를 이용하여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창3:15). 우리는 이 세대의 조류에 따르지 말아야 하며, 또한 그 안에서 살아서도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조류에서 나타난 정신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 세대를 통찰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살아야 한다. 이렇게 할때만이 교회의 간증이 더욱 더 강하고 힘이 있게 된다!

자아의 네 가지 표현

‘자아’노선에는 네 가지의 표현이 있다. 첫째는 성, 둘째는 육축을 침, 셋째는 악기, 넷째는 날카로운 기구와 병기이다. 이 네 가지 표현에는 하나의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완전히 자아 즉‘나’의 존재를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안락한 생활을 누려야 한다. 나는 먹고 마시며 누려야 한다. 나는 정신적인 쉼을 누려야 한다. 나는 전쟁의 힘을 가져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의 이익이 손해를 입지나 않을까 염려한다. 모두가 ‘나’로 표현되어 있다.

이 자아 노선에서 살아갈 경우, 결국에는 라멕이 될 것이다. 비록 성경에서 그를 몇 마디의 글로만 기록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가 얼마나 교만한 사람인 가를 알 수 있다. 라멕이 그의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창4:23) 라멕의 어투는 자신 밖에 모르는 광기에 찬 외침과 같다. 또 그는 이어서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라고 말했다 (창4:23-24). 이 광기에 찬 말투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역질나게 한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욱 가증스럽다. 이에 당신은 너무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말라. 이는 라멕 뿐만 아니라 생명나무 안에 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상황일 것이다. 다만 어떤 사람은 그 상황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을 따름이다.

셋으로 부터 나온 생명 노선

생명 노선에 관한 표현은 창세기 5장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 노선은 가인과 아벨에서 부터 시작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아담에서 부터 시작한 것이다. 이는 4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마치 없었던 것과 같다. 실로 기이하다!

창세기 5장 3절에서는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아담의 첫째 아들의 이름은 셋이다. 가인도 아니고 아벨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셋과 아벨은 한 사람이다. 아벨이 죽으므로 셋이 부활한 것이다. 아벨은 공허하고, 셋은 세움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기뻐하셨다. 아벨이 죽은 후에 셋을 세워 아벨을 대신케 하셨다. 성경은 셋을 언급할 때 [모양 곧 자기(아담) 형상과 같다]라고 말했다. 아담은 정말 놀랬고, 기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셋의 안과 밖이 그와 흡사하며, 더욱 놀라운 것은 셋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과 비슷하다 라는 것이다. 외모(모양)도 닮았을 뿐만 아니라, 내면(형상)도 닮았다. 할레루야! 실로 기묘하다, 하나님은 너무 지혜로우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 (롬11:33-34)

셋의 출생은 영적인 뜻이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출생의 순서대로라면 그는 첫번째 아들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따르면 그가 첫번째 아들이다. 셋이란 이름의 영적인 뜻은 ‘부활 안에서 기름부음을 받은자’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운신 자이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통치를 하셔야 했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나타 내셔야 했고, 그를 통해 왕국을 가져 오셔야 했으며, 또한 사람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셔야만 하셨다. 셋은 실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체험들을 겪었을 것이다.

여덟 사람, 여덟 가지 생명의 상황

셋으로 부터 모두 여덟 사람이 나왔다. 이는 여덟 가지 생명의 실제  상황을 말해 주고 있다. 이 여덟 가지의 상황은 동시 병행한 것이며, 생명노선의 내용을 구성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셋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기름부음 받은 자의 내용들이다.

1)에노스ㅡ약함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창4:26). 에노스의 뜻은 바로 약함이다. 셋 이후 에노스를 볼 수 있듯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봄으로서 우리 자신들을 돌아 볼 수 있다. 당신이 셋 일수록 당신은 더욱 더 에노스일 것이다. 당신이 만유를 포함하신 주님을 알수록 당신은 당신이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을 의지할 때 약함 이외에 자랑할 것이 없지만 그러나 당신이 주님을 의지할 때 자랑할 것이 있고, 약하지만 약함 가운데 강함이 있다. 에노스가 바로 그러한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다. 이에 첫번째 간증은 바로 ‘약함’이다. 공허가 아니고 약함이다. 그리스도가 있는데  어찌 공허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약함의 체험이 있다. 나에게는 약함 뿐이며, 능력의 실제는 나에게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 있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지혜이다. 한 면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본래의 모습을 알게 하고, 다른 한 면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과정을 통하여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얻게 하실려는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약함 가운데 살게 하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수시로 그분을 앙망하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의 풍성한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에노스 때 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4:26). 에노스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약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 주님의 이름은 그에게 실로 보배이었다. 당신은 왜 수시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가? 그것은 당신이 자신의 약함을 알기 때문이다. “오, 주 예수여! 오, 주 예수여! 나는 당신으로부터 떠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 나의 약함을 살펴주옵소서! 오, 주여, 나의 생활, 행동 그리고 나의 존재 마저도 모두 당신에게 의탁합니다!” 만일 당신이 한 면으로 자신의 약함을 나타내고, 다른 한 면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앙망하면, 당신은 게난의 상황이 있게 될 것이다.

2)게난ㅡ 얻음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창5:9). 게난의 뜻은 얻음이다. 이는 생명 실제의 얻음을 가리킨다. 당신이 약함을 느낄 때나 약함 가운데에 있을 때, 당신은 자연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며, 주님의 풍성을 얻게 된다. 당신이 부르기만 하면 바로 그분 자신을 얻을 수가 있다. 주님께서 당신의 약함을 나타내실때 그 때가 바로 당신이 그분 자신을 얻을 때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이는 생명을 얻는 길이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약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약함을 모르면 생명을 얻을려고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색안경을 쓰고 집회에 온다. 그들은 집회 가운데에서 무엇을 더 얻으려 하지 않고, 다만 재판관이 되려고 한다. 그들은 전적으로 비평과 판단을 하며, 시비를 일으킨다. 왜 색안경을 쓰는가? 그것은 자신들의 약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약한지  얼마나 무능한지 또는 얼마나 수시로 주님을 앙망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도리어 그들은 ‘나는 성경을 몇 번이나 읽었고, 나는 몇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했으며, 나는 어린이 또는 청소년들을 봉사했다’라는 일들만을 생각 할 뿐이다. ‘나’라고 할 때마다 ‘나’에게는 한 색깔이 칠해진다. 나! 나! 나!  너무도 자신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약함이 없다. 이러한 사람들은 너무나 가련하다. 자신들에게는 무엇인가 자랑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고, 집회에 올 때마다 색안경을 쓴다. 그들은 성도들의 부르짖는 것을 불평하거나 설교를 못하는 것을 비평하며, 또한 젊은 사람들을 가볍게 여기거나 노쇠한 사람들에게는 화를 내기도 한다. 그들은 항상 자기들에게는 무엇인가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비평과 판단으로 가득하며 공급은 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빛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진실로 주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약함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집회 가운데에서 주님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집회만을 판단하게 된다.

주님께 감사하자! 지난 세월 동안 주님의 회복의 흐름이 우리 가운데 계속 흘러 많은 형제 자매들이 그 안에서 함빡 젖어 자양분을 만끽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흐름 때문에 잃어버리게 되고, 그 흐름 가운데에서 헤엄치지 못하고 (겔47:5), 도리어 그 흐름 속에 매몰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자신의 약함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자신이 낫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얕보거나 유치하게 보아왔다. 그는 비평을 함으로 주님의 임재와 주님의 얼굴의 빛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에는 그 강물에 덮여 매몰 된 것이다. 이는 매우 준엄한 일이다. 당신에게 자신이 생기고, 약함을 모르게 될 때  당신은 생명을 얻지 못한다. 설령 구원 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형제가 일어나 소리를 질러도, 당신이 무엇인가 얻고자 한다면 먼저 단순한 마음으로 아주 간단하게 그의 영을 누려야 할 것이다. 결코 그가 갓 구원 받은자라고 해서 당신에게 공급할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지 말라. 혹 그의 말이 유치하더라도 그의 구원받은 신선한 영은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게난이 되려면 반드시 먼저 에노스이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 자신의 약함을 모르고 빛 가운데 겸손히 살지 않는다면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동시에 있는 것이지, 점진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에노스이면 동시에 게난이다. 이 두 가지의 상황이 동시에 우리에게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운신 셋을 누리게 될 것이다.

3)마할랄렐ㅡ영광

[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창5:12) 마할랄렐은 영광이란 뜻이다. 우리가 약함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을 부르고, 주님을 앙망하며,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실제와 공급을 얻는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 영광스러운 주님인 것을 깨닫게 된다. 영광스러운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시면 우리는 영광스러운 그릇이 된다. 많은때 우리가 성도와 함께 성경을 읽고 추구할 때 주님으로 부터 말씀의 공급을 얻고, 우리 안에 기름부음의 느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 안에서 소망으로 가득차 있고, 영광으로 가득차 있으며, 기쁨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삼층천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할레루야! 이것이 바로 마할랄렐의 상황이다.

4)야렛ㅡ 내려옴, 평범함

[마할랄렐은 육십 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창5:15)  야렛의 뜻은 내려옴 또는 평범함이다. 즉 자신을 낮추고, 교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놀라운 것은  주님의 영광을 보게되면, 그사람은 자랑과 교만을 못할 뿐만 아니라 함부로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못한다. 주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그사람은 자신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고, 아무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주님을 뵙게 되면 자신을 높게 평가하지를 못한다. 또 주님의 영광을 보았다고해서 교회의 작은 봉사에는 참여하지 않고, 오직 중책만을 맡을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곧잘 가까이한다. 그의 생활이 아주 평범하고 자연스러우며 교만한 자세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는 큰 은혜를 입었지만, 사람의 높음, 낮음, 강함, 약함에 관계 없이, 사람들에게 다가서서 교통을 한다. 그가 전한 말씀에는 빛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은 천사와 같이 멀리 있지 않아서, 우리가 친근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마할랄렐 뿐만 아니라 야렛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주님의 말씀을 얻고, 영광의 느낌으로 충만하다고 해서 사람들 앞에서 으시대는 것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선포하는 것과 같다. “어이, 누가 감히 나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들인가?” 이 말은 아주 영광스럽고 마할랄렐과 같으나 생명노선 안에 있는 마할랄렐이 아니고, 육체노선 안에 있는 라멕이다. 우리는 마할랄렐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야렛이어야 한다. 이렇게 할때만이 사람들이 당신을 무서워하지 않고 가까이 할 것이다. 우리의 주님은 참으로 생명노선에 계시는 야렛이다. 그분의 안은 하나님의 영광이시지만, 밖은 아름답지 않으시고, 많은 이들의 종이 되셨다. 이것이 우리가 있어야할 위치이다.

5)에녹ㅡ배움이 있음

[야렛은 일백 육십 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창5:18) 에녹은 배움이 있다라는 뜻이다. 생명노선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가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뿐만 아니라 또한 에녹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가 배움이 가득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영적인 추구에 배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의 손짓 하나도 함부로 하지 않고 배움이 있다. 그의 생활의 각 부분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 조각되었다. 당신은 그의 설교를 듣지 않아도 다만 그와 함께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곳에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한 주님의 종을 알고 있는데, 그가 어느 지방에서 특별집회를 주최 하고 있을 때, 집회에 갓 나온 한 소망이 있는 형제를 발견한 후, 집회가 끝나고 식사하는 동안 휴식을 마다하고, 그 형제에게 찾아 가서 교통을 하며 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보았다. 또 한번은 우리가 공항에서 그 주님의 종을 마중할 때 우리 가운데 한 형제가 그에게 몇 마디 농담을 했는데, 그는 즉각 그 형제에게 매우 정색하며 대하는 것을 보았다. 이 두 사건은 나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정말 배움이 많은 분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고, 또 사람을 온전케 하는 마음도 깊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도의 거만한 자세가 없을 뿐더러 자신을 낮추며 사람을 가까이 했다. 또한 그는 누구에게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였다고 해서 결코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지 않았다.  그의 사업은 결손이 있을 수 있고,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그러나 자신이 드리는 그 한 몫에 대하여서는 절대로 존중하고, 다른 사람들의 간섭을 용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종을 만질때 당신은 마치 하나님 자신을 만지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럴때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더 많은 배움이 필요한가를 느끼게 될 것이다.

에녹은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후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 (창5:22,24) 이 성경 구절을 읽다 보면 우리의 천연적인 생각으로는 에녹이 날마다 방 안에서 성경 읽기와 기도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도 에녹처럼 해서 어느 날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하나님에 의해 들림 받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바뀔 필요가 있다. 성경 읽기와 기도를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 전체 과정 중에서 배움이 없다면 당신의 성경 읽기와 기도는 장식품에 불과하고, 교만함만이 증가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비천에 처하는 것도 배워야 하고, 풍부에 처하는 것도 배워야 하며, 순경(順境)에 처하는 것도 배워야 하고, 역경에 처하는 것도 배워야 할 것이다. 악명에 처하는 것도 배워야 하고, 미명(美名)에 처하는 것도 배워야 할 것이다. 동역하는 것도 배워야 하고, 권위에 순종하는 것도 배워야 할 것이다. 어떤 환경에 있든지 영 안에서의 자유와 영향력이 있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또한 날마다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의 죽음의 공과를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마담 잔느 귀용 (Madame Jeanne Guyon)이 체험한 것과 같은 깊은 십자가의 공과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체험은 실로 우리로 하여금 흠모하게 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 시대에 있었어 주님의 사역의 표본이었다. 그녀의 배움과 체험은 아직도 오늘날 성도들의 영적 생활의 표본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의 어려움은 너무 쉽게 교만하고, 너무 쉽게 열등감을 갖는 데에 있다. 우리는 이러한 높고 낮음의 생활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 안에서는 조금의 확신도 없는것 같다. 설령 주님으로부터 어떠한 부담을 받았다 하여도 감히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묵시가 있는 사람은 많지만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은 배움이 모자란다. 만일 배우지 않는다면 많은 말씀과 설교는 그들에게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다. 교회 가운데 우리에게  진실한 배움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우리가 날마다 배움 가운데 살수 있도록,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도록 간구해야 할 것이다.

6)므두셀라ㅡ주님의 오심을 기다림

[에녹은 육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창5:21)  므두셀라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다 라는 뜻이다. 그에게 일단 앞에서 언급한 체험들이 있게 되면 그에게는 주님의 재림이란 묵시의 통제하에 살게 하는 생활이 있게 된다. 그가 하는 일마다 주님의 재림과 연결한다. 그는 일을 할 때마다 주님의 재림을 연상(聯想)한다. 므두셀라는 구백 육십 구 세를 향수한 인류 중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그의 아들 라멕보다 더 늦게 세상을 떠났다. 라멕이 죽은 지 12년 후에서야 므두셀라가 죽었다. 오늘날 우리는 외부의 징조(sign)만 보고 주님이 곧 오신다 하면서 추구와 집회와 기도를 하고 깨어 있어 들림 받기를 기다린다. 이는 충성스럽지만 그러나 견문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진실한 간증은 주님의 재림의 묵시 가운데 사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시는 것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 혹 5년, 10년,  50년이든 간에 우리에게는 마찬가지 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묵시 가운데 살아야 하고, 수시로 깨어 있어 그분의 오심을 예비 해야 할 것이다. 설령 우리가 반드시 사망의 골짜기를 거쳐야 할 때에도 그분 뵙기와 그분의 칭찬 받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매우 옳은 것이다.

7)라멕 ㅡ거칠음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창5:25) 라멕은 거칠다는 뜻이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과 배움이 있는 사람은 왜 하필이면 반드시‘거친’사람이어야 하는가? 주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아노선 안에서 술 주정하는 라멕이 아니라, 생명노선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열광하는 라멕이다.

오늘날 교회는 바로 이러한 라멕이 부족하다. 많은 사람들은 추구와 배움이 있고, 새끼양 처럼 온유하고 사랑스럽지만 사자와 같지는 않다. 사람을 무서워하고, 주님을 위해 용감하게 강한 말을 하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침례 요한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모른다. 사람의 위세를 무서워 하지 않고, 강건하고 담대하게 주님의 부담을 교회 가운데로 이끌어 가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한 부담을 형제 자매의 마음 속에 깊이 심어 주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대를 무릅쓰야 할 것이며, 심지어 죽음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만을 위해 끝까지 미칠 것이다.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주님을 위하여 열광해야 할 날이 바로 오늘이다. 언제 쯤 장노 또는 책임 형제로 ‘승진’할 것인가를 제발 계산하지 말라. 또한 집회가 좋던지 나쁘던지 몇 사람이 침례를 받았는지에 대해서 계산하고 따지지도 말라. 우리는 반드시 열광해야 한다. 주님을 위하여 열광하고,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 열광하여야 한다. 우리의 열광이 마치 이방인이 총칼로 사람을 죽이듯, 우리는 성령의 검으로 사람의 영과 혼을 찔러 쪼개기까지 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열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라멕이 없었다면 주님의 회복은 영원히 이끌어 올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은 오늘날 설교하는 사람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부담을 갖고 열광하는 라멕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주님께서는 칠십 명의 훈련 받은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으시고, 칠십 명의 라멕이 필요하시다. 이들은 마치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칠십 명의 이스라엘 사람처럼 주님의 부흥을 가져 온다. 우리는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의 상황이 필요할 뿐 아니라 라멕의 상황도 필요하다. 당신은 사람들에게서 칭찬만을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종교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될때만이 당신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부담이 날이 갈수록 더 무거워지기를 원해야 하고, 심지어 무거워서 주님께 이렇게 말하기를 원한다. “주님, 만일 당신께서 일을 하시지 않으시면 나는 절대로 당신을 쉬지 않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라멕이 되어야 한다. 강한 라멕이 되어야 한다.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라멕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이러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얻으셔야만이 교회 가운데에서 나아갈 길을 얻게 되실 것이다.

8)노아ㅡ안식

[라멕은 일백 팔십 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창5:28-29) 노아는 안식이란 뜻이다. 사람이 라멕의 상황이 나타날수록 그는 더욱 더 주님을 믿게 되고 그의 영도 더욱 더 안식이 있게 된다. 그는 그의 마음 속에서 이러한 긍정적인 말을 할 것이다. “주님, 당신께서 일을 하시옵소서! 주님, 당신께서 일을 하시옵소서! 주님, 나는 다만  여기서 부지런히 노력하고 땀과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일을 하시옵소서!” 사람이 이 수준에 오게 되면, 그의 마음 속에는 안식이 가득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그를 통하여 이루어 질 것이다. 우리도 무언가를 보고 배우고 또한 일어서기를 원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에 어느 날에 가서는 사람들이 우리를 만났을 때, 밖으로는 부지런하고 수고를 하지만, 안으로는 안식이 가득한 사람으로 보여질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한 무리의 사람들을 통하여 땅끝까지 통행할 것이다. 이것이 노아이다.

위의 여덟 가지의 상황은 여덟 단계가 아니고,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이 여덟 가지의 상황에서 생명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신지와 영광이 얼마나 충만하신지를 알 수 있다. 그럴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랑할 것은 우리가 그분의 은혜의 대상자라는 것이다. 이 모든 풍성은 우리의 누림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생명노선에 사는 것은 너무도 가치가 있다. 성령께서 친히 이러한 말씀을 우리 안에 써놓으시어, 우리의 일생의 묵시와 일생의 추구하는 목표가 되기를 원해야 한다. 이 여덟 가지의 상황에 있으면 우리는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셋이 되고,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뜻을 이룰 수 있고, 하나님과 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만족을 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고, 또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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