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장
ㅡ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분깃임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분깃이며 또한 은혜 받은 자들의 분깃이기도 하다. 오늘날 하나님이 은혜 받은 자들의 분깃인 것을 체험하려면 대체로 네 가지 방면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 자신의 원칙을 얻음, 하나님 자신의 과정을 얻음, 하나님 자신의 상황을 얻음,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결과를 얻음이다.
하나님 자신의 원칙을 얻음
여기에 하나의 원칙이 있다. 만일 당신이 그 원칙 안에 거한다면 당신은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분깃인 것을 볼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분깃이 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 원칙안에 산다면 당신은 옳은 길 안에 있고, 반대로 그 원칙안에 살지 않는다면 당신은 쉽게 종교적인 생활 안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체험에 의하면 이 원칙에는 적어도 세가지의 중점이 있다.
1. 방패와 큰 상급이신 하나님을 깨달음
아 브람이 제왕들을 쳐서 이기고 돌아온 후 여호와 하나님께서 묵시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창15:1 원문에 의해 의역). 방패는 하나님이시고 큰 상급도 하나님이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인식 없이 주님을 따르거나 하나님 자신을 얻으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얻고자 한다면 항상 우리에게는 힘이 없고, 심지어 나의 추구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큰 상급이 되시며, 밖으로는 방패가 되신다. 밖의 방패로 말미암아 안의 큰 상급을 얻는다. 안의 큰 상급으로 말미암아 밖의 방패를 확장한다.
처음 시작할 때 당신의 방패가 너무 작아서 불쌍하였다. 왜냐하면, 당신의 상급인 당신 안에서의 주님이 아주 조금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츰차츰 당신 안에 상급이 더하게 되면서 방패도 확장되고, 주위 모두가 방패가 될 정도로 확장된다. 이럴 때 사람들이 당신의 생각을 공략할 수 없고, 사람들이 당신의 감정을 공략할 수 없으며, 사람들이 당신의 의지도 공략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을 공격할 때 당신의 육체를 격동할 수 없을 것이고, 당신의 자아를 득죄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당신을 공격하더라도 당신은 요동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방패가 작은 사람은 어떠한 일이든 그의 생각을 만지게 되면 그는 생각에 빠져 뛰쳐나오지 못한다. 또 어떠한 일이든 그의 감정을 만지게 될 때 그는 온종일 슬픔에 잠겨 헤쳐 나오지 못한다. 그의 방패가 너무 작으므로 뚫린 구멍이 많을 수밖에 없다. 생각을 처리하지 않고, 새로움과 정결함 없이는 그리스도가 증가하지 않고, 방패도 확장하지 않을 것이다.
주 님께서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방패와 상급, 하나는 밖의 것이고, 하나는 안에 것이다. 밖의 방패는 사탄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안의 상급은 하나님의 풍성을 더하고, 생명을 성장케 하며, 무한한 생명의 공급이 된다. 때로 주님 안에서 체험이 깊은 지체들을 만날때면 당신은 마음 가운데서 진실로 주님을 경배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주님,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이 형제에게 방패가 꽉 들어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형제는 사탄이 어떻게 공격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대적하던, 상황이 어떻게 분주하던, 그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며 굳건히 서 있다. 그 어떤 마귀의 궤계와 악한 자의 화전도 그의 마음 안으로 쏠 수 없다. 사람들이 마음에 생각한 것과 모든 말들은 그의 마음을 만지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안의 상급이 크고 생명이 풍성하더라도 자신만만하게 “사탄아, 너의 화전은 내 안을 쏠 수 없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교만이다. 방패의 기능을 잃게 하고, 대적에게 공격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방 패와 상급은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주님을 좇고 주님 자신을 얻고자 한다면 처음부터 깨달아야 할 것이다.“주님, 당신을 찬미합니다. 오직 당신 자신만을 찬미합니다. 나의 노력이 아니고, 나의 결심이 아니고 ,나의 기호가 아니고, 나의 열심도 아닙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완전히 당신입니다. 당신께서는 나의 방패이시며, 안으로 당신께서는 나의 상급이십니다. 밖으로는 당신께서 사탄을 대적하는 방패가 되시고, 안에서는 당신 자신을 나에게 주십니다.” 상급이 많으면 많을수록 방패가 크고, 방패가 크면 클수록 상급이 더 많다. 양자(兩者)가 서로 교체하며 서로 돕는다. 당신이 주님 자신을 얻고자 한다면 첫째로 나 자신은 완전히 없으며, 나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며,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하신다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주님은 나의 방패이시며 또한 나의 상급이시다. 밖으로 주님께서는 방법이 있으시고, 안으로도 역시 주님께서는 방법이 있으시다. 밖에서는 주님께서 원수의 모든 화전을 대적하시고, 안에서는 또한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의 공급이 되신다. 지금부터 당신은 “나는 곤고하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이 보이지 않고, 나의 노력이 없으며, 나의 몸부림도 없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모두가 그분께서 하실 것이다. 시작도 그분께서 하셨고, 마지막도 그분께서 하실것이다.
2. 끊임없이 최초의 묵시 가운데 생활함
영 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말씀하셨다 (행7: 3). 이것은 주님께서 아브람에 대한 첫번째의 부르심이고, 또한 그의 최초의 묵시였다. 이 땅은 무엇인가? 바로 주님 자신이다. 아브람이 우르를 떠날 때 그는 그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전혀 몰랐었다. 그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도 전혀 몰랐었다. 그리고 장래 어떠한 일이 있을것인지도 그는 전혀 몰랐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주 확실한 것을 보았던 것이다.“나는 하나님을 만났다. 이제부터 그분을 따라 나의 앞길을 갈 것이다. 비록 어떠한 길을 가야 할지 모르지만, 그리고 가야 할 곳이 어떠한 땅인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나타나신 그분을 확실히 알고 있다.”
(1) 그분만을 알고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원함
이 원칙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부르심을 받을 때나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 무엇이 자손인가를 아는 사람은 없다. 무엇이 하늘의 뭇별이며 바닷가의 모래인가? 무엇이 원수의 성문(城門)인가? 우리는 다만 어리둥절 예수를 만나서 그분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렇게 단순하다. 당신도 처음 주님을 사랑할 때 지금보다 더 단순했는가 아니면 지금보다 더 복잡했는가? 대답은 필시 단순했다고 말할 것이다. 단순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오직 하나님만 원하는’ 상황은 바로 우리의 최초의 묵시이며, 그 묵시 가운데서 우리의 한평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처음부터 아주 단순하였다. 마치 그분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처럼 베드로도 마찬가지로 단순하였다. 나사렛 예수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고귀한 신분도 없었다. 그러나 그분께서 갈리리 바닷가에서 그분의 영광을 베드로에게 보이시면서 “나를 따라오느라!” 말씀하셨다 (마4:19). 베드로는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바로 이렇게 단순하다. 베드로는 연구하지 않았다.“오, 이는 나사렛 사람이다. 당신은 무엇으로 나로 하여금 당신을 따르라 하는가? 당신에게 무슨 특별한 것이 있는가? 당신을 따르면 무슨 영광과 앞날이 있는가?”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단순하게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예수 한 분을 만진 것이다. 이분은 하나님께로 오신 분이시며,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므로 우리가 한평생 좇을 만할 가치가 있다. 진실하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이러한 나타나심이 있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나타나심이 없다면 영원히 견고하지 못할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형제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고 나서 보이지 않게 된다. 또한 자매들도 결혼 대상자를 찾게 되고, 시집을 가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직접 뵙게 하여, 그분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보배로운 분이심을 감탄하는 일 없이는 우리는 많은 시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영원히 견고치 못할 것이다. 이러한 봄은 우리가 한평생 주님을 따르는 기초가 될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마다 반드시 이러한 봄이 있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봄이 없다면 그는 두 가지의 일을 할 수 있다. 첫째, 주님께 열심히 기도로 아뢰어야 할 것이다.“오, 주님, 나는 아직 당신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따라서 동작만을 배웠습니다. 이 상황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나타나심을 구합니다!” 둘째, 빨리 가서 학위를 챙기고 앞날을 챙겨라. 형제 자매들 가운데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왜냐하면, 묵시가 없으면 조만간 떨어져 나갈 것이다. 조만간 떠나갈 바에 왜 오늘 떠나지 않는가? 어째서 여기서 시간 낭비를 하는가? 만일 우리가 만번 집회했고, 백만번 주 예수를 부르고서 끝머리에 우리는 다만 “오! 오늘의 집회는 정말 좋군요!”라고 말한다면 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만일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오, 하나님, 나는 반드시 당신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진정으로 당신의 나타나심을 원합니다. 당신의 나타나심 가운데 살겠습니다.”라고 아뢰어야 할 것이다.
(2) 우리가 일평생 주님을 따르는 근거
최 초의 묵시는 우리가 일평생 주님을 좇는 근거이다. 최초의 묵시가 있고 나면 그 후 하나님의 매번 나타나심은 당신 안에 있는 그분의 확장이시다. 나타나심의 횟수에 관계없이 이러한 나타나심은 최초의 묵시로부터 떠날 수 없으며 오히려 계속 더하게 된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첫번째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하시었다. 두번째 나타나셨을 때는 첫번째 말씀하신 것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를 더하셨다. 여러분에게 묻겠다. 복을 주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땅’이 좋은가?‘땅’ 이 첫 번째의 묵시는 복 받는 기초이다. 이 기초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이 미래에 사도나 장로 또는 큰 쓸모있는 그릇이 될 수 있는지를 물어 볼 필요가 없다. 이는 당신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시다. 당신은 다만 하나님 자신을 만났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밖 의 일들을 주의하는 것이 아니고, 신명을 바쳐 열심히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 주님의 얼굴 빛이 없고, 주님의 임재가 없고, 주님 자신을 얻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헛된 것이며, 가치를 잃은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의 나타나심을 얻고, 주님을 믿은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오직 10여명 정도 밖에 구원을 시키지 못하였다면 그의 다년간의 집회와 설교는 그를 하여금 얼굴을 들수 없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보다 더 가련하기 때문이다.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은 주님께 “주님, 당신께서 나에게 나타나시지 않으셨는데, 어찌 나에게 요구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주님을 보았고, 그분의 영광스럽고 아름다움을 보았으며, 또한 그분과 달콤한 교통을 했던 사람들이다. 어느 날 주님을 뵙게 될 때 오직 썩은 고철만을 내놓고 “주님, 보십시오. 나는 설교를 하였지 않습니까? 특별 집회를 인도하였지 않습니까? 교회 인도 직분도 맡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얼굴을 들수 있어야 하고, 가련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단지 이러한 것들로 우리를 칭찬하지 않으신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최초의 묵시는 우리 일생의 근거이다. 그날에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을 뵙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 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심은 적어도 일곱 번이나 있었다. 그분의 나타나심이 갈수록 더 높았고, 갈수록 더 풍성하였으며, 갈수록 하나님의 마음을 더 만지게 하였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억할 것은 이는 영원히 하나의 기초 위에 건축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얻은 묵시는 첫 번째의 묵시를 대체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세 번째로 얻은 묵시는 두 번째의 것을 대체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약속하신 것은 땅이었다. 아브라함은 영원히 이 땅을 떠날 수 없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땅에서 하나님 자신을 얻는다.
(3) 마지막에도 역시 그분이심
우 리는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이 헷족속에게 매장지를 구하는데 까지 보았다 (창 23장). 이는 정말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온 사람이다. 그는 이 부르심을 위하여 일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라가 죽었는데도 그는 죽은자를 장사할 땅 조차도 없었다. 그는 헷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매장지를 사야만 했었다. 그는 헷족속 앞에 몸을 굽히면서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라고 말했다 (창23:4).
여러분은 보아야 한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에게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하나님, 이 땅은 당신께서 저에게 약속하셨지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저는 이처럼 초라합니까?”라고 하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이 사람은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내용보다도 더 귀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날의 말로 말한다면 이렇다. 그 어느 사역도 그에게 속하지 않는다. 어느 교회도 그에게 속하지 않는다.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 시작부터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과 관계를 지속한다. 하나님 이외에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에서도 참으로 이러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는 모든 축복과 체험의 내용이 모두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이 없다면 기초를 잃을 것이고, 최초의 그 묵시도 잃어버릴 것이다.
하 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곱 번 나타나신 가운데에 세 개의 중점이 있다. 땅, 자손(사람)과 민족이다(중국어 성경에는 나라로 번역). 하나님은 항상 아브라함에게 땅을 얻고, 사람을 얻고, 민족도 얻으며 대적을 성문으로 얻는 약속을 하셨다. 사도행전 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오직 땅만을 언급하셨다. 창세기 12장에서는 땅과 민족(나라)을 말씀하셨고, 13장에서는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15장에서는 하늘의 뭇별을 말씀하셨고, 17장에서는 민족(나라)의 세우심과 군왕을 말씀하셨다. 2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일곱번째로 나타나실 때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와 대적의 문을 얻는 것과 그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것 이라고 말씀하셨다. 정말로 좋다! 너무나 좋다! 그러나 유의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매번 나타나심은 모두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체험이 있고 난 후 이다. 이 나타나심의 결과는 오직 하나님 자신을 더 체험하라는 것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받은 자들의 분깃인 최초의 그 묵시를 변경하시지 않는다. 이 묵시는 영원히 바꿀 수 없다. 마지막에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을 보지 못했고, 땅의 티끌을 보지 못했고, 대적의 문을 보지 못했으며, 그의 씨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얻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 자신을 얻고 체험하였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그의 일생의 분깃이었다. 주님을 찬미하자!
3. 십자가의 역사하심을 체험함
15 장에서 아브라함이 암소, 암염소, 수양,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여 제사를 드리는 데에 솔개가 그 시체 위에 내릴 때에 아브라함이 쫓았다고 하였다 (창15:11). 이는 사탄이 우리의 제사를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믿음을 갖고 그를 쫓아야 한다. 17절에는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 상황은 우리 일생의 체험에서 두 가지의 원칙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살고, 하나님 자신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두 가지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하나는 타는 횃불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연기 나는 풀무이다.
(1) 험난한 흑암의 풀무가 있고, 휘날리고 번쩍이는 타는 횃불이 있음
풀무는 사망을 대표한다. 신명기 4장 20절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풀무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라고 말하고 있다. 풀무는 사람이 줄곧 사망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타는 횃불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빛 되심을 의미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영광을 느끼게 한다. 당신과 나의 일생의 세월에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으며,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다. 풀무가 있고 타는 횃불이 있으며, 풀무가 있고 횃불이 있다. 다윗의 체험은 바로 이와 같다. 그가 골리앗을 죽인 후 여인들은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는 노래를 불렀다(삼상18:7). 이 어떠한 위엄이며 영광인가! 그 후로 그는 군대의 장이 되었고 (삼상 18:5) 사울의 사위가 되었다. 정말로 의기양양하며 순풍에 돛을 단 것 같았다. 이때의 그는 결코 사울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는 도망하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체험도 이와 같다. 우리는 때로 모든 일이 순조롭고, 영도 드높으며 날마다 할렐루야이다. 그러나 어느 때는 곤고하고 험난하며, 밤마다 안식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타는 횃불이 있고 쇠풀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일생의 체험은 이것을 떠날 수 없다. 당신이 의기양양할 때‘쇠풀무’가 곧 올 것이라는 것을 주의하라!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낙담하지 마라. 왜냐하면‘타는 횃불’이 곧 오기 때문이다. 만일 한동안 쇠풀무가 없고 타는 횃불이 없다면 오히려 회개를 하여야 할 것이다.
타 는 횃불을 탐욕 하지도 말고, 쇠풀무도 두려워하지 마라. 쇠풀무는 타는 횃불을 위한 것이고, 타는 횃불은 쇠풀무를 위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항상 평온과 순탄한 가운데서 오랫 동안 주님의 임재가 있다 하면 그 ‘주님의 임재’는 문제가 있다. 특히 젊은 형제 자매들은 한동안 주님에 대해 깊은 체험이 있어야 한다. 만일 일년 동안에 별 일 없고, 어려움이 없고, 풍파도 없었다면, 지나치게 좋아하지 마라. 회개해야 한다. 주님께 “주여, 당신은 나를 원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한 해 동안 모두가 타는 횃불이고 쇠풀무는 없습니까? 어찌하여 한 해 동안 전혀 시련이 없고, 질병이 없고, 사람에 의해 처리 받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에 의해 파쇄하는 것이 없습니까? 주여, 정말로 저를 원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제가 그렇게도 가련합니까? 정말로 세월이 이렇게 평온하게 지나가도 됩니까?” 당신은 주님과 교섭??을 버려야 한다. 그럴 때 당신 안에서 해방할 수 있을 것이고 ,파쇄할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손에 쓸모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체험은 반드시 쇠풀무, 타는 횃불, 쇠풀무, 타는 횃불이어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 사람의 ‘사망’은 두려워하지 않지만, 사람의 ‘미지근’함을 두려워함
주님께서는 사람의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사람의‘미지근’ 함을 두려워하신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셨다 (계3:15-16). 사람이 미지근하면 자연스럽게 종교 안에 살게 된다. 성장이 없는 반면, 별문제도 없을 것이다. 교회가 생명의 성장이 있으면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고, 번성하는 기상이 있게 된다. 이때 당신이 볼 때 교회에 어려움이 있는가? 시간과 심혈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러한 교회 생활이 우리에게 많은 쇠풀무와 타는 횃불의 체험을 준다. 만일 우리의 교회 생활이 오로지 ‘오늘 집회는 정말 좋다 집으로 돌아가자!’로 끝난다면 정말 큰일이다. 하나님 앞에 ‘차가운’ 사람은 느낌이 들고, 감탄하며 “오 주님, 나는 일년 동안 집회를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지 않았고,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나를 구출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할 것이다. 주님 앞에 ‘더운’ 사람도 느낌이 있다. 그의 안에는 뜨거운 피가 끓고 있으며, 날마다 주님께 “주여, 더 높이, 더 깊이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참으로 타는 횃불 상황에 놓여 있다. 그는 피곤하지 않으며, 오히려 목마르고 배고파서 주님께 더 많이 더 높이를 원한다. 그러나 얼마 있다가 주님께서 타는 횃불을 거두어 가시고, 그에게 쇠풀무의 체험을 주실지도 모르신다. 아뭏든 횃불은 앞으로 나갈 수 있고, 쇠풀무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유독 ‘미지근함’만이 사망을 가져 온다. 주님을 좇는 사람은 끊임없이 타는 횃불과 쇠풀무를 체험함으로 외면에서 볼 때는 오르락 내리락할지 몰라도, 그러나 내면에서는 계속 전진한다. 만일 우리가 쇠풀무와 타는 횃불이 놓여 있는 상황을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손안에서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다.
만 일 최초의 나타나심에 문제가 없고, 여러 차례의 나타나심에 대해 체험을 했지만, 쇠풀무와 타는 횃불의 체험을 한 번도 만지지 못했다면, 당신은 주님과 진실하게 교섭을 가져야 할 것이다. 주님께 아주 심한 환경과 깊게 새겨질 수 있는 체험을 간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오로지 병을 앓거나, 타격을 받아야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당신이 그러한 마음가짐이 있어야만이 십자가의 역사를 볼 수 있으며, 성령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큰 일과 작은 일을 불문하고, 당신에게 임할 때면 즉시 타는 횃불과 쇠풀무가 당신에게 다가왔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당신은 이제 다시 어리석은자 처럼 허송세월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신령한 형제가 청년들이 넘어야 할 다섯 개의 관문을 지적했다. 그것은 학업, 취업, 결혼, 군 복무, 사업이다. 그는 청년들을 향해 또 이렇게 말했다.“당신들은 좋긴 하지만, 이 다섯 개의 관문을 꼭 넘을 수 있다 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은 정말 맞다. 그러나 당신은 자신에게 이 다섯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마라. 당신은 수시로 하나님의 손이 당신에게 계신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만일 날마다 오직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 만을 안다면 당신은 많아야 두 개의 관문밖에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손이 계속 당신에게 있다면, 당신의 한평생은 도망갈래야 도망갈 수 없게 되고, 조금만 움직여도 매를 맞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손이 당신에게 있다면 당신이 움직일 때마다, 성령의 가르침이 있게 될 것이고, 당신이 주님의 길을 가고 싶지 않을 때에도 가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의 손이 있다면 복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돌아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여, 저는 얼마나 제 자신을 분별하여 당신에게 드려야 할지 모릅니다. 저는 제 자신을 당신 앞에 펼쳐 보입니다. 당신의 손이 저로부터 영원히 떠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뜻대로, 수시로 훈계해 주시고, 수시로 매질도 하옵소서. 앞으로 나는 다만 횃불과 쇠풀무만 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쓸모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과정을 얻음
하나님의 약속하심은 모두가 아들과 연관된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몇이나 있는가? 영적으로 말하면 모두 셋이다. 또한 세 종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천연적인 아들이고, 둘째는 육체에 속한 아들이며, 셋째는 영에 속한 아들이다.
1. 천연적인 것을 대표하는 엘리에셀을 잊음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창15:2). 아브라함이 아직 아들을 얻지 못했을 때 그는 천연적인 생각으로 청지기를 아들로 삼았으며, 하나님과 대화를 할 때에도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주님을 좇을 때, 생명의 체험에 의하면 첫 번째로 튀어나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천연적인것이다. 다른 사람의 설교 하는 방식에 따라서 나도 그렇게 설교를 한다. 다른 사람의 찬송과 기도를 하는 방식에 따라서 나도 그렇게 찬송과 기도를 한다. 다른 사람의 할렐루야를 외치는 방식에 따라서 나도 그렇게 할렐루야를 외친다. 이 모두가 엘리에셀이다. 만일 우리가 신령한 형제 또는 자매의 모든것을 모방하면 신령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앵무새와 같다. 사람의 소리는 있을지언정 사람의 생명은 없다. 하나님의 길을 가는 사람은 모두가 엘리에셀을 드리게 될 것이다. 이때에 하나님 자신을 얻기에는 아직 먼 거리에 있고, 단 하나의 묵시를 갖고 길가는 것을 배울 따름이다. 한 면으로 말하면 이 상황을 보려면 하나님의 빛이 있어야 하고, 다른 면으로 말하면 이 상황은 당신의 생명이 점차 성장을 거듭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고, 또한 자연스럽게 잊게 될 것이다. 때문에 엘리에셀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어려움이 아니었다.
2. 육체를 대표하는 이스마엘을 제함
천 연적인것은 진정한 어려움이 아니다. 오히려 육체가 바로 우리가 알아야 할 어려움이다. 첫 걸음에서 육체는 없다. 두 번째 걸음에서야 큰 육체가 나오게 된다. 왜 ‘큰 육체’인 이스마엘이 있는가?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묵시를 확실하게 본 후, 부지런히 수고하여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성취하려기 때문이다. 바울의 말을 빌려 말하면, 이것이 바로 율법의 원칙 안에 사는 것이며,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를 잊은 것이다 (갈3:10). 하나님의 모든 뜻을 나 자신의 방법으로 완성하려는 것이 바로 이스마엘이다.
육체를 대적하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 육체를 제하고 이스마엘을 쫓아내는 것은 이삭을 얻기 위함이다. 이삭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예표한다. 하나님의 과정을 얻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바로 영 안에 사는 것이다. 당신의 영이 충만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환경을 일으켜 당신의 육체를 제하신다. 동시에 당신에게 힘을 주시어 계집종과 그가 난 아들을 능히 쫓아내게 하신다. 엘리에셀, 이스마엘, 이삭, 이 세 아들은 우리가 일평생 하나님을 얻는 세개의 과정을 대표한다. 최초는 천연적인것이다. 이는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다. 이어서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 한다. 당신은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낳으려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 아들이 당신의 대적인 것을 발견할 것이다. 육체에 속한 것은 반드시 성령에 속한 것을 핍박할 것이며, 마지막에는 완전히 하나님의 약속과 댓가 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입은 사람, 방법이 없는 사람, 그리고 가장 단순한 사람이 되게 하신다. 또한 단순한 믿음으로 영과 묵시 가운데서 모든 사물을 보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 우리는 절대로 엘리에셀을 원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이스마엘도 원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우리로 하여금 오직 단순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삭만을 원하길 바란다.
3. 오직 성령을 따라 난 이삭만 있음
오 직 성령을 따라 난 것이어야만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오직 성령을 따라 난 것이어야만이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며 약속하신다. 당신이 엘리에셀을 아들로 삼으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에셀은 너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당신이 이스마엘을 아들로 삼으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은 너의 육체를 따라 났고, 반드시 내어 쫓아야 하며, 유업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형제 자매여!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중히 여겨야 한다. 날마다 주님께 간구하고, 또한 자신이 성령을 따라 난 자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할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길을 더욱 갖게 되실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상황을 얻음ㅡ완전함
1.자신을 완전히 간파함
오 늘날 자신을 간파한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기도할 때 늘 자신을 죄수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말할 때 우리는 항상 순복하지 않는다. 이는 바로 우리가 자신에 대해 본 것이 있지만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은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하늘에 속한 생활을 하며, 영광을 얻는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날마다 자신의 약함과 자신의 무능함을 본다. 자신의 약함을 간파한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완전함을 더욱 증거할 수 있다.
(1) 나는 전능한 하나님
창 세기 17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이르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바로 모든 것을 소지하시고, 모든 것이 풍족하시며, 풍성하신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다. 참으로 신기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실패하고서 그가 이스마엘을 낳은 후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완전함은 당신이 승리를 얼마나 했는가에 있지 않고, 오히려 당신 자신이 실패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를 아는 데에 근거한다.
만 일 당신이 “좋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춤을 추자, 그러면 더욱 빨리 완전하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은 한다면 그것은 방종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원칙은 사람으로 하여금 육체의 모든 힘을 소멸케 한 후에 그분께서 오셔서 말씀하신다. 우리 자신의 방법이 모두 소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람이 실패하고, 더 이상 실패를 못할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이 풍족하며, 풍성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이르신다. 하나님께서는 질책하시러 오시지 않으셨을 뿐더러, 위안하시러 오시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말씀하시려고 오셨으며, 우리로 하여금 행하여 완전하게 되는 것을 원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참으로 크시고 높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이렇게 하실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승리를 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하게 하셨다면 나는 필시 펄펄 뛰어 “할렐루야, 내가 참으로 잘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케 하셨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약할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나를 완전케 하심으로 나는 다만 엎드려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오, 주여, 당신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고, 사역을 하시지 않으시며, 공급해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완전하기가 불가능합니다.”
하 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이르셨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완전히 간파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으시다. “너의 일평생의 체험은 모두 내가 책임진다.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이 풍족하고, 풍성한 하나님이다. 네가 무엇을 필요로 하든지 나는 모든 책임을 질 수 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때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었던 것은 그가 참으로 자신을 간파한 것을 말해 주고 있다.
(2) 만감이 교차한 웃음
당신이 자신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죄를 시인할 때, 달콤함을 느끼면서 수치스러움도 느끼고, 믿기지 않으면서 또 믿을 수 있는 느낌을 체험한 적이 있는가? 이는 바로 완전함의 뿌리이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몸을 마치 죽은 것처럼 여겼고 ,또한 사라의 경수도 끊어져 가망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을 때, 그는 감히 하나님께서 그와 농담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믿으려 했지만 믿기지 않았다. 믿기지 않지만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우리도 같은 체험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의 부르심이 우리에게 임했을 때, 우리는 놀라며 심지어 의심하는 어투로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사람을 잘못 찾지 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나 입니까?”라고 말을 하면서 웃었을 것이다. 이 웃음은 기쁜 웃음이 아니라 만감이 교차한 웃음이다. 아브라함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시여, 나는 아닙니다. 당신께서 사람을 잘못 찾으셨습니다.”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러나 감히 그렇게 말을 할 수 없었다. 한면으로 그는 하나님을 떠날 수 없었고, 다른 면으로 그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한면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든 다 가능합니다.”라고 말한다. 다른면으로 “하나님께서 저를 버리면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참으로 자신을 간파한 것이다.“오, 하나님이시여, 저는 무능합니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약함을 알고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 당신께 많은 긍휼과 축복을 구합니다.” 라고 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축복마저 원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주여, 나는 곧 죽게 되었습니다. 나의 몸이 살아날 수 있도록 당신께 간구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어리석게도 자신에게 웃으면서 “내가 정말 내년에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라고 말하였지만, 감히 하나님께 “하나님이시여, 나를 갖고 농담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스마엘을 낳은 것으로도 너무 고통스럽습니다.”라고 불평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아주 자신 있게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성취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더욱 냉담하게 “하나님이시여, 나는 당신으로부터 떠났습니다. 다시는 나를 찾아와 귀찮게 하지 마십시오.”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했을 뿐이다. 오, 이 상황은 참으로 보배스럽다. 이 한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조성되므로, 그에게는 생명이 충만하고, 공급이 풍성하며, 하나님의 뜻이 가득차 있었다. 이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이르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완전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고, 그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 그가 믿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믿을 수 없기에 그는 엎드려 웃었던 것이다. 만감이 교차한 웃음이다. 그는 여러 가지의 느낌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 당신께서 10년 또는 8년 전에 오셨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 있는지를 아시고 계십니까? 하나님, 오늘에 와서야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이는 나를 자극합니다. 하나님, 나를 당신께 맡깁니다. 다만 당신께 힘을 구합니다. 하나님, 나는 진정으로 당신을 믿기를 원하지만 나에게는 믿음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이끌리어 진정으로 자신을 간파하여, 마치 하나님 앞에 소멸한 것처럼 도망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고, 기도도 못하며, 앙망도 못한다. 한면으로 자신은 이처럼 약하지만, 다른면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풍성하시다. 한면으로 하나님의 풍성을 믿지 못하지만, 다른면으로 하나님의 풍성 안에 산다. 이 체험은 정말로 너무 기이하다.
(3) 믿지 못하지만 떠날 수 없음
주 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어 우리의 육체를 끝내고, 어느 날 그분 앞에 엎드려 웃으면서 “주님, 나는 진정으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직 생명 안에서만 자신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방법이 얼마나 있는가를 보지 말고, 다른 사람의 모양을 모방하지 말고, 모든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주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하실 일이 있으시면, 만일 주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어떤 인도가 있으시면, 만일 주님의 생명이 우리를 이끌어 그분 자신을 갈수록 더 깊게 체험하게 하신다면, 다른 체험들에 대하여는 관여하지 말라. 그것은 당신의 일이 아니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은 밖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의 요구를 하실 때 주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떠날 수 없고, 일도 못하게 되기를 바란다. 감히 “하나님, 못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고, 또 감히 “하나님,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도 못한다. 다만, 땅에 엎드려 탄식하면서 “주여, 긍휼을 구합니다.” “ 오, 주여, 나는 죽었습니다” “오, 주여, 나는 감히 당신께 힘을 구하지도 못합니다.” 힘을 구하는 일마저도 이스마엘이 될 수 있다. 나는 믿을 수 없지만 결코 떠날 수 없는 그것이 바로 믿음의 실제이다. 믿음의 실제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을 나는 알았다’가 아니다. 믿음의 실제는 ‘할렐루야, 나는 줄곧 주님 앞으로 나갔다.’도 아니다. 믿음의 실제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일하시는 것이며, 그 일은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하신다. 비록 그 사람은 죽었지만 약속이 있다. 설령 약속은 있지만 확신은 없다. 비록 확신은 없지만 신뢰 할 수 있다. 비록 신뢰 할 수 있지만 믿기지 않는다. 비록 믿기지 않지만 떠날 수 없다. 그의 모든 상황이 모두 하나님 앞에 나타났다. 이때야 비로소 그는 자신을 완전히 간파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들을 잘 모르고 있다. 우리 안에는 계획, 계산, 생각들이 너무도 많다. 주님의 축복을 앙망하는 데 쓰는 시간도 많다. 주님의 긍휼을 앙망하는 시간도 많다. 우리는 아직 이렇게 말하는 정도까지 되지 않았다. “주여, 나에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의 긍휼로 말미암아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이 마치 나의 것이 아닌 것 같고, 당신께서 나에게 주신 묵시는 마치 성취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긍휼로 말미암아 나는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참으로 길을 갖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오 늘날의 교회는 참으로 이와 같은 생명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엘리레셀은 너무 많고, 이스마엘도 너무 많으며, 심지어 이삭의 원칙을 갖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오늘날 주님에 의해 합당하게 조성된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한면으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하심이 충만하다. 다른면으로 그는 자신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한면으로 그는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 다른면으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부터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자신을 알면서 자신에게만 웃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은 매우 적다. “하나님, 저는 떠날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시니 저는 감히 못한다는 말을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이 부르심은 저에게 너무 높습니다. 당신의 이 약속하심은 저에게 불가능합니다. 당신의 이 부르심은 저에게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께서 이스마엘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 저는 제가 누구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께서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진실로 쓸모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그 가치가 높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이러한 최초의 묵시를 거스리지 않고, 끊임없이 십자가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주여, 오직 당신뿐입니다. 나를 의지할 때 이스마엘밖에 낳을 수 없습니다. 주여, 나는 이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는 감히 원망을 못합니다. 나는 다만 당신의 긍휼을 원합니다.”라고 말하게 한다.
2. 하나님의 뜻과 연합함
한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으로 하여금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시게 될 때 그 사람은 완전한 상황에 있게 될 것이다. 이 완전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도하실 뿐 아니라, 그도 하나님을 인도한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을 하실 뿐 아니라, 그도 능동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한다. 은혜를 깊게 입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인도 하심을 받는 사람은 바로 우리가 원하는 가장 좋은 사람이다. 만일 교회 가운데 한 무리의 형제 자매들이 줄곧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산다면 그들은 참으로 좋은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더 높은 체험을 보았다. 주님께서 그를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의 필요하심을 보고, 주님과 동역하며, 능동적으로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을 이룬다. 주님께서는 하나의 필요가 있고, 주님께서는 하나의 원함이 있으시며, 주님께서는 하나의 일하심이 있다. 이 필요함, 원함, 일하심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인도하심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무리의 사람들, 그들의 믿음이 활발하여 어느 단계에 이르러 그들의 생명이 성장하여, 어느 단계에 이르러 능동적으로 하나님 손안에 있는 일들을 성취한다. 때문에 창세기 18장은 우리에게 하나의 보배로운 이야기를 알려 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관계가 있다. 롯은 이때 마침 죄악의 성 안에 살고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를 지나가실 때 아브라함이 그들을 보자 곧 영접하여 집에 모셔 쉬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또한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갔다. 그들이 걸어가는 도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창18:20-21).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롯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매우 영리하였다. 그는 롯을 언급하지 않고 다만 계속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다.
[그 성 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겠습니까?]
[거 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거 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창18:24-32)
그 는 하나님께 여쭘을 통하여 하나님을 자신 안으로 이끌어 갔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고 있으시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고 있을 뿐 아니라, 그도 하나님을 붙잡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있고, 하나님께서도 그의 손에 계신다. 그는 온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도 그의 배정(配定)을 들으신다. 하나님과 그는 하나의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조화 가운데 하나님 마음에 있는 일하심이 산출하게 된다.
만 일 당신도 이러한 것을 보았다면 오늘날 우리의 봉사가 얼마나 얕고,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는다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생활하면서 감히 일어나서 “나는 하나님의 손에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도 나의 손안에 계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꼭 붙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도 하나님을 꼭 붙잡고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이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상황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연합하고 나서 그는 모종의 상황 가운데 살게 된다. 그가 일할 때 하나님께서도 일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실 때 그도 한다. 그는 하나님을 따라서 한다. 하나님께서도 그와 맞춰서 하신다. 하나님과 그는 진정한 동역자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 기도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우리로 하여금 성장하여, 주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도록 간구하여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조금이라도 움직이실때 바로 느낌으로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를 알 정도로 성장하여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어디서 무엇을 하시고 계시면, 우리도 거기서 주님과 함께 일하는 정도로 우리와 주님의 연합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럴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담으로 부터 나와 하나님의 부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날로 부터 당신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알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을 도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게 된다.
3. 믿음이 있어, 자신의 약함을 넘음
사 람이 완전하다는 것은 그가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완전한 사람도 실패한다. 또한 이 실패는 그의 최초의 실패와 같다. 아브라함의 첫번째 실패는 그가 애굽에 내려가 자신의 아내를 바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창12:9-20). 두번째 실패는 자신의 아내를 아비멜렉에게 주었지만 (창20) 아비멜렉은 사라를 가까이 아니하였다. 차이는 여기에 있다. 첫번째의 실패는 그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판 것을 말한다. 두번째의 실패는 다른 사람이 그의 은혜를 뺏어갈 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침범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주신 은혜를 온전히 보전하셨다. 완전한 사람은 약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치 아브라함처럼 약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연로하신 형제분들, 신령한 형제분들 그리고 주님과 연합한 형제분들은 사람과 하나님의 눈빛 안에서는 모두가 완전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실패와 약함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실패가 있을 수 있으며, 아주 큰 실패일 수도 있다. 또한 약함도 있을 수 있으며 아주 심한 약함일 수도 있다. 차이는 그들은 그들의 실패와 그들의 약함을 초월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아비멜렉의 집 모든 부녀자가 아이들을 낳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하시고, 그들을 치료하시고 생산케 하셨다. 비록 아브라함 자신은 아직 아들을 갖지 못하였지만, 그는 참으로 그의 약함을 초월하고, 사람들을 위해 입을 열어 기도하였다. 아들이 없는 사람이 기도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생산케 했다. 이런 말이 있다. [의원아, 너를 고쳐라](눅4:23). 일반적으로 당신의 모든 축복은 당신이 체험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아브라함이 사람들에게 준 축복은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것이다. 은혜를 많이 입지 않은 사람은 그가 사람들에게 준 것은 모두가 그가 체험한 것이다. 그가 체험한 만큼 사람들에게 준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는 하나님께 축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막 은혜를 입은 사람이거나, 주님 앞에 노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체험은 줄곧 그들 자신의 체험이나 자신의 계시 가운데에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이 완전하다면 그는 자기의 약함을 넘길 수 있고, 자신에게 없었던 축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축복이 될 수 있다. 또한 자신이 체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 전달하므로 다른 사람들의 체험이 되게 한다.
참 으로 영광스럽다. 만일 완전한 사람이 실패가 없고 약함이 없다면, 사람들이 영광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한 신령한 사람,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한 사람이 아주 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의 신령한 복들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으므로 사람들로 복을 얻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은 자신의 약함을 전혀 보지 않을 정도로 크다. 그들은 자신을 완전히 간파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이 바로 그들이 보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그들이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완전히 하나님과 연합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오늘날 우리는 믿음을 갖고 자신의 약함을 초월하는 아브라함보다 못한 것 같다. 우리가 약함 가운데 사람들에게 축복을 줄 수도 없을 뿐더러 약함 가운데 있게 되면 몇일이 지나서야 일어나 조금씩 회복을 하면서 다시금 조금씩 주님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묶임 가운데서나 약함 가운데서나 그는 여전히 일어나서 하나님의 은사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4. 하나님을 극히 두려워함
그 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바로 그 말씀을 따라 행하는 정도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감히 반항을 못한다. 그에게 약함이 있으며 또한 하나님을 극히 두려워한다. 한 사람이 얼마나 신령한가는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를 보면 알수 있다. 신령하지 않은 사람이나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런 체험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느낌을 모른다. 당신과 나는 어떻게 신령한 것과 신령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최근 2개월 동안에 성장이 있는가를 알고 싶다면, 최근 2개월 동안에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진실한 영적인 성장은 모두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한다. 성장할수록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거나 축복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노를 격동시키지 않으려는 것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왜 이삭을 바쳤는가?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자는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이르렀다. (여기에‘극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번역하면 뜻이 더욱 명확함)(창22:12). 그는 이삭을 바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성경에는 ‘죽음으로부터 부활’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죽음에서 부활케 하는 약속이 있다 할지라도 굳이 멀쩡히 살아 있는 아들을 죽여서 다시금 그를 죽음에서 부활케 해야 했었는가? 아브라함은 결코 아들이 죽음에서 부터 부활하는 것을 보려고 이삭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마음속에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말씀하실 때 당신이 따라서 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당신이 바치지 않는다면 그분께서 반드시 이삭을 데려갈 것이다. 만일 당신이 바치면 그분께서 이삭의 생명을 보존해 주실지도 모르신다.”는 것이다. 그는 감히 하나님의 노를 격동시키지 못하는 정도로 하나님에 의해 조성되었다. 하나님께서 바치라 하시면 그는 바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라도 바쳐야 했었다. “주님, 당신께서 그를 죽음에서 부활케 하셔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당신을 순종합니다. 당신께서 책임지셔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얕게 입을수록 하나님의 손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이다. 은혜를 깊게 입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손을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은 밖으로 표현된 경외와 경건함이 아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말할 수 없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소홀히 못하는 것과 침범 못하는 것과 모욕(侮辱)을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 하심이 있다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당신을 주목하시면, 당신도 그분을 주목하여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현재 일을 하지 않으면 그분께서 당신을 매질해서라도 일을 하시게 한다. 만일 당신이 현재 그분을 따르지 않으면 그분께서 매질해서라도 당신으로 하여금 따르도록 하신다. 당신은 매질을 당하면서 따르는 것보다 미리 순순히 따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한 사람이 그의 성장이 완전한 정도에 이르게 되면 항상 조심하며 두려우면서 “주님, 과연 이렇게 하여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어본다. 그가 아는 모든 것을 다 따른다. 육체의 따름이 아니다. 이러한 사람은 마음 안에서부터 하나님을 경홀히 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참으로 아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주님의 은혜를 입고 “주님, 나는 당신이 두렵습니다.”라고 말하면 당신에게 복이 있다. 만일 당신이 지금까지 그렇게 기도한 적이 없다면, 당신은 아직 무엇이 두려운지를 모르고 있다. 다만 사면을 구하는 것만을 알고, 주님께 힘을 구하는 것만을 알고, 일만을 알고, 다만 성장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여러분은 주의하기를 바란다. 위에서 언급한 것은 하나님을 얻는 네 가지 상황 속에 있지 않다. 즉 자신을 간파하고, 하나님의 뜻과 연합하고, 믿음으로 자신의 약함을 넘기며,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있지 않다. 하나님을 얻는 네 가지 상황 가운데 ‘사면을 구함’이란 것은 없고, 힘을 더하는 것이 없고, 일하는 것이 없으며 또한 성장이란 것이 없다. 이 네 가지 상황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범위를 넘고, 완전히 초월한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기도마저도 “주여, 지금 나는 끝장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간파했습니다.”라며 기도한 적이 없고, 또한 “주여, 당신께서 무엇을 하시렵니까? 내가 동력하겠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심지어 “주여, 나는 연약합니다. 실패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나를 빌어 무엇을 하시렵니까?”라는 기도를 하지 않고, 더욱이 “주여, 나는 당신을 두려워합니다!”라는 기도도 하지 않는다. 이 네 마디의 말은 매우 간단하지만, 이 네 마디의 말의 체험은 완전함을 대표한다.
5. 하나님 자신을 얻은 결과는 오직 하나님 뿐임
마 지막에 아브라함의 느낌 가운데에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었다.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무엇을 하시렵니까? 나는 당신을 거역할 수 없고, 반항할 수 없고,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완전히 당신의 손안에 있습니다. 당신께서 하시고 싶은 데로 하십시오. 나는 오직 한가지만 원합니다.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시 창세기 11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우르로부터 떠나라는 말씀을 회상해 보자.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행7:3). 그때 그는 하나님밖에 없었다. 지금 그는 이삭을 바쳐 손에 칼을 잡고, 이삭을 죽이려 하는 순간 그는 필시 이러한 느낌이 있었을 것이다.“하나님이시여, 시작부터 끝까지 오직 당신밖에 없습니다.”그가 칼을 잡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선택하시어 우르를 떠나게 하시고, 하란을 거쳐 한걸음 한걸음의 여정 가운데 수많은 서러움과 어려움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다 끝났다. 정말로 끝났다. 지금의 그는 하나님의 요구에 아멘해야 할 따름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다시 하나님께 바친다.
우 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이외에 우리에게는 다른 분깃은 없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 할 때 그의 마음은 필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있었을 것이다.“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나타나심으로 나를 이 경지로 이끌어 왔습니다. 지금 당신께서 약속하신 것들이 모두가 헛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축복하신 것들이 모두가 헛되었습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들이 모두가 헛되었습니다.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나는 이제 당신께 순종하지 않을 수 없고, 나는 이제 당신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체험한 모든 것에 많은 승리가 있고, 많은 흥분이 있고 ,많은 강건함이 있고, 많은 실패가 있고, 많은 약함이 있고 ,많은 수치도 있습니다. 그러나 흥분도 좋고, 승리도 좋고, 강건함도 좋지만, 모든 것이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내가 칼을 잡고 당신의 약속의 중심인 이삭을 죽입니다. 이 순간 나의 일생의 길은 종점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 이 모든 것이 당신께로 부터 나온 것이라면 나는 달게 받겠습니다.”
여러분은 유의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길이다. 우리의 길은 하나의 죽음의 길이다. 우리의 길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고, 오직 하나님 자신만을 남게 하여 우리의 분깃이 되도록 이끌어 갈 것이다. 우리에게 많은 흥분의 나날, 승리의 나날, 광명의 나날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흥분, 승리, 광명의 나날이 우리에게 준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뿐이다. 우리는 많은 시련과 약함과 타격을 겪을 수 있지만, 이러한 시련과 약함과 타격들이 우리에게 준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뿐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에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주여, 오직 당신 자신뿐입니다. 주여, 오직 당신 자신뿐입니다. 당신께서 약속하시고, 당신께서 나에게 일구신 일의 결과ㅡ 바로 나의 독생자마저도 당신의 손안에 있습니다. 오직 당신 자신뿐이십니다. 한평생의 일은 이제 다 잃었고, 사람의 칭찬과 사람의 유명함도 잃었으며, 당신께서 나에게서 이루어야 할 뜻 마저도 잃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단지 당신 앞으로 나아와 당신께서 진정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마지막에 우리를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의 분깃이 되시는 경지까지 이끌어 주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