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스케치 - 제 9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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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할  수 없는 좇음

ㅡ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길임

하나님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길임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대표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생활 특징, 즉 모든 관심이 하나님께 집중된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참으로 주님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모든 사물이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 어린이 주일 학교를 인도하는 것, 청소년의 봉사 등 모든 것이 당신의 뜻에 따라 움직일 수 있지만, 만일 당신이 신령한 길을 걷고자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관심은 조금도 없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이 근원은 백 퍼센트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하나님께서 손을 놓으시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하나님의 보호를 잃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하나님의 공급을 잃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부르심을 받는 자들에게 말한다. 우리가 한걸음 한걸음 주님의 길을 걸어갈 때에 우리가 앞으로 내딛는 모든 발걸음이 하나님 자신인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길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체험은 다만 그 체험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체험을 주시는 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앞에 걷게 하시고, 그분 자신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서 그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성령님의 다스림이다. 나는 다시 한번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가 말한 것은 신령한 말이지만, 하나님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대학 진학에 실패했지만, 그의 영적 상황은 즉시 하나의 전기(轉機)를 갖게 된다. 이 전기는 그가 걷는 모든 발걸음이 하나님의 인도함에 따라 걷고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 자신을 체험한 것을 통하여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활발하시고,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실제적이시며, 또한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요동함이 없는 견고하심이시다.

1.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거짓임

우리가 앞으로 걸어갈 때나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서 함께 걷고 있을 때, 오직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길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없으면 하나님 안에서 걷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다 거짓이다. 타락한 종교 관념은 우리에게 자주 이러한 생각을 하게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내가 이토록 주님을 사랑하니까 필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내가 이토록 주님을 사랑하니까 나의 자녀는 필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안 되면 주님의 수치이시다.” 솔직히 말해서 이러한 관념들은 모두가 사단에서 온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의 길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형통에 유의하지 않고, 고난에도 유의하지 않으며, 당신은 당신이 걷는 한걸음 한걸음의 발걸음이 하나님 안에서 걷고 있는가에 관심하여야 할 것이다. 당신이 내딛는 모든 발걸음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주님을 찬미하라.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발걸음은 헛수고이다. 우리 가운데에 하나님의 인도함이 있으실 때 그분께서 이끄시는 길은 늘 우리의 상상과 다르다. 우리는 자주 “주여, 당신께서 우리를 하나의 험난한 길이거나, 형통한 길이거나, 의(義)의 길이거나, 물가가 가까운 푸른 초장의 샛길이거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음침한 골짜기는 나다. 푸른 초장도 나이다. 의의 길도 나고, 모든 것이 다 나이다! 내가 너를 이끌고 가는 이 길은 바로 나 자신이다! 만일 네가 내 안에 걸어오면 걸어올수록 나를 체험케 되고, 걸어오면 걸어올수록 나를 알게 되며, 걸어오면 걸어올수록 나를 볼 것이다. 이럴 때 모든 것이 다 옳아질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이 다 헛수고로 돌아갈 것이다!

이 땅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생활은 처음 시작부터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의 발걸음이 더욱더 당신 안으로 걸어가도록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길은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과 우리는 갈라질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길이 없습니다. 만일 당신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앞으로 걸어갈 수 없습니다. 내가 기도로 말씀 읽을 때 기도를 위해서 기도로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얻고자 기도로 말씀을 읽습니다. 나는 집회를 위하여 집회에 가지 않습니다. 나는 집회를 통하여 당신을 얻습니다. 나는 영을 해방코자 영을 해방하지 않습니다. 나는 영의 행방을 통하여 당신을 얻습니다. 나의 생활, 사업, 담화, 행동을 막론하고, 모든 것이 나를 당신 안으로 인도합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실로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2. 하나님 이외에는 사람에게 앞날이 없음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직도 많은 얕고 비천한 관념들이 있다. 그러한 관념들이 사람을 평가하는 표준을 만든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들을  대학에 진학할 것인가, 직장을 가져야 할 것인가, 유학을 갈 것인가에 의해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결정하고 실행하는 데에 하나님이 그들의 길인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가 공부함으로써 하나님을 더 많이 얻었다면 ‘진학을 해라!’ 할 것이고, 만일 그가 공부를 통해 하나님을 얻지 못했다면 ‘신문 배달을 해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눈에 신문 배달원과 박사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는 우리의 타락한 사람들이 타락한 생각을 받아들여 다르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이 가는 길을 준비해 놓고  그에게 “당신은 이렇게 가면 틀림 없소” “당신은 이렇게 가면 형통할 것이오” “당신은 이렇게 가면 앞날이 있을 것이오.”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이외에는 사람에게 앞날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길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시면 길이 없다. 만일 하나님을 얻지 못한다면 길이 없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눈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주목하여야 하고, 많은 계산과 많은 평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이끌어 주신다. 주님을 좇는 길에서 우리는 항상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오직 당신만이 나의 길이십니다. 나의 하루하루 생활이 모두 다 당신 안에서 걷기를 원하며, 나의 하루하루 추구도 모두 다 당신을 얻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ㅡ 믿음을 낳음

우리의 느낌 가운데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처음에는 항상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가운데서 믿음을 낳는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심은 그로 하여금 믿음을 낳게 했다. 로마서 4장 17절은 그가 믿음의 아버지라고 언급한다. 창세기 15장 6절도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한다.

1. 설명할 수 없는 믿음 생활

우리가 성경을 읽어 보았지만 아브람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다. 당신은 아브람이 하나님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며 고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창15:2). 그는 또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아뢰었다 (창17:18).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하고 말씀과 약속을 하셨다 (창15:5). 그러나 아브라함은 엎드리어 웃으며 마음속으로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오?]라는 생각을 했다 (창17:17). 이것이 바로 그의 의인가? 그는 웃었으나 하나님을 보고 웃지 않았다. 그는 다만 그와 같은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하는 생각에 웃었을 뿐이다. 아브라함의 체험을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의 높은 체험들을 아직 겪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은혜를 좀 더 오래 입게 되면, 어느 날 우리도 진실로 하나님께 “하나님, 당신이 나 같은 사람도 필요로 하십니까?!”라고 물어볼 것이다.

이 믿음은 실로 기이하다. 믿음은 우리가 어느 날 하나의 뚜렷한 묵시의 인도함을 받고서 바로 “형제·자매들이여, 나는 정확히 보았다. 이후부터 나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믿음이 아니다. 이는 감동이다. 이 감동은 집회가 끝나면 사라질 수 있다. 믿었던 하나님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진정한 믿음은 설명할 수 없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의 아브람에게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이르셨다 (창7:3). 그는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들었던 것 같다. “내가 이사를 해야만 한다. 왜 이사를 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더러 이사하라 하시니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는 모른다.” 이에 아브람은 하란에 이르러게 되었다. 하란의 뜻은  바싹 마르다이다. 아브람은 건조 무미한 곳으로 이사한 것이다. 그의 느낌 속에는 이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이 하나님의 부르심인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의 느낌 가운데에는 단지 하나님께서 이사하라 하시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그 후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나타나셔서 (창12:1) 그곳을 떠나게 하므로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우리에게 하나의 특별한 것을 보여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확신을 갖게 하여 일어나서 선포케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소수 예외는 제외)늘 일종의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다. 비록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주님을 좇게 한다.

우리 생활의 체험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많은 사람이 항상    간증하는 것처럼 그렇게 뚜렷하지 않고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깊은 곳에서 하나의 실제인 무엇인가를 만지게 된다. 바로 이 만짐이 당신으로 하여금 떠날 수 없게 하고, 돌아갈 수도 없게 한다. 또한  당신으로 하여금 주님의 길을 가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 길을 갈 때 실로 당신은 아브람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것이다. 성경의 기록은 적극적이다. 비록 아브람은 자신이 어디로 갈지를 몰랐지만, 그는 이 길을 갔다. 나는 다시 말하지만, 그는 실로 어디로 갈지를 몰랐다. 그래서 그는 길을 잘못 가게 되고 가나안의 북쪽 하란이란 곳으로 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타나심 가운데 체험한 믿음 생활은 우리의 상상과 다르다. 우리는 종종 우리에게 믿음이 있고 보았던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그와 정반대이다. 믿음의 생활은 그리 뚜렷하지 않으며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그러한 상황 가운데로 가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왜 그러한 상황 가운데에 가야 하는가?  왜냐하면  이는 내 안에 하나의 실제를 만졌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도대체 당신은 무엇을 만졌습니까?’ 하고 물어 온다면 당신은 정확하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만짐, 실제적인 그것이 실은 바로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다. 이 나타나심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

2.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믿음의 길

사람이 하나님의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 편에서의 필요하심은 우리에게 나타나심이고, 우리 자신 편에서의 필요함은 바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면 우리에게는 믿음 이 있게 된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많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더 크게 된다. 우리 가운데 아마도 믿음을 갖고 “하나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아직 시련을 겪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에게 시련이 오게 되면, 당신은 즉시 당신이 원래부터 믿음이 없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당신에게 믿음이 없는데도 왜 계속하여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인가?  왜 계속하여 시간을 할애하는 것인가?  정답은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지면 기묘하게도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길을 가게 하는 생활을 살게 하신다. 믿음을 너무 높게 보지 말라. 믿음 생활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원인도 명확히 알지 못하면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오라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데, 이로써 우리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길을 가게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길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나타나심을 사용하시어 우리를 이끄신다. 이럴 때 우리에게 믿음이 산출되고,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게 한다. 또한, 우리는 시간을 할애할 수 있고, 자신도 함께 드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다만 주님 앞에서 이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오직 당신께서 말씀하신 ‘오라! 오라! 오라!’ 만압니다. 당신께서 나타나시면 나는 길을 갑니다. 나의 믿음 생활은 당신의 나타나심에 따릅니다.” 나는 이것이 어떠한 나타나심인지를 설명할 수 없으며, 어떠한 믿음인지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나에게 당신의 나타나심이 있을 때 믿음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체험이 그렇지가 않은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생명이 성장하고 전진한다. 이는 실로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이다. 이러한 생활은 실로 기묘하다. 우리가 주님을 뵐 때에 자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가 이렇게 말을 할 것이다. “하나님, 나는 얼떨결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당신에 의해 당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는지도 몰랐을 뿐 아니라  당신에게 이 많은 일이 있는 것도 몰랐습니다. 바보 같은 나라는 사람이 당신에 의해 여기에 이렇게 서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입어  우리가 이기는 자가 되어 휴거될 수 있다면, 휴거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에게도 한 몫이 있다는 것에 놀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며 자신을 아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믿음 가운데서 믿음의 길을 조금 걸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급ㅡ제단과 장막의 생활을 낳음

우리에게 하나의 나타남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생활은 마치  이리저리 길을 걷는 것 같다. 당신이 이리저리 길을 갈 때에 항상 하나의 공급이 있는 걸 느낄 것이다. 이 공급이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시다. 가나안 땅은 바로 하나님의 공급이시다. 여기에 세 곳이 있다.

세겜ㅡ세겜은 어깨, 힘이라는 뜻이다. 세겜에 있으면 당신은 하나님의 힘을 체험할 것이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힘이 당신을 붙들어 주며 하나님의 길을 가게 한다.

벧엘ㅡ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또한, 교회이다. 아브람의 장막은 아이와 벧엘 사이에 있다. ‘아이’는 난잡한 더미란 뜻이다. 우리의 생활은 교회와 난잡한 더미 가운데에 있거나 교회와 우리의 육체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두 번째의 공급은 우리를 집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집에서 모든 풍성을 체험케 하신다. 집이 없는 사람은 정상적인 생활이 없다. 교회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길을 잘 갈 수가 없다.

헤브론ㅡ헤브론은 교제란 뜻이다. 우리가 주님을 좇고, 교회 생활 가운데 살아갈 때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가 필요하다. 교제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든 풍성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생활을 산출하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장막과 제단의 생활이다.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에 제단의 생활을 하여야 하고, 또한 이 땅에서 정착하지 않은 나그네이므로 장막 생활을 하는 것이다.

1. 제단의 생활을 삶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심이 많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을 더욱더 체험하게 되고, 또한 제단을 더욱더 쌓아 하나님께 제사를 올릴 것이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있다 해서 반드시 제단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합당한 곳에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있을 때만이 제단의 생활이 있는 것이다. 그날 하나님께서 우르에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었을 때 아브람은 제단을 쌓지 않았고, 하란에서 그에게 나타나시었을 때에도 그는 제단을 쌓지 않았다. 세겜에 도착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자 그는 제단을 쌓게 되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제단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급이 제단을 가져온다. 당신이 하나님의 공급 가운데 있으면 당신은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드릴 것이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당신으로 하여금 길을 가게 하고, 하나님의 공급이 당신으로 하여금 자신을 그분께 드리게 한다.

2. 장막의 생활을 삶

장막의 생활은 바로 정착된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장막 생활을 하는 사람은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모르고,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실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동할지, 어떻게 다음 걸음을 걸어야 할지를 모른다. 어디가 자신이 정착할 곳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아주 쉽게 자신들을 예배당에 놓아둔다. 그럴 때 이 예배당이 나의 정착한 곳이 된다. 그것이 잘못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여기에 하나의 원칙이 있다. 우리가 장막 생활의 원칙을 벗어나 한 곳에 정착하여서 한 교회에 머물러 봉사를 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경영 가운데 문제가 있게 된다. 우리는 항상 이러한 인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주여, 나는 다만 장막 안에 있습니다. 당신께서 인도하시는 곳이라면 어떠한 곳이라도 가겠습니다. 당신께서 인도하시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당신께서 나를 인도하여 이 길을 걷게 하시면 이 길을 걷겠습니다. 나는 언제든지 장막을 접어 앞길을 갈 수 있습니다. 주여, 당신께서 나로 길을 걷게 하실 때 즉시 길을 걸을 수 있고, 당신께서 나로 멈추라 하실 때 즉시 멈출 수 있습니다. 나는 일부러 표류하지 않고, 일부러 정착하지도 않습니다. 나에게는 오직 하나의 느낌이 있을 뿐입니다. 주여, 나는 현재 뿌리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 나의 장래와 앞날과 봉사에 관해 물었습니다. 나는 다 모릅니다. 나는 오직 온유하고 조용하고 안식하며 제한 가운데서 당신의 말씀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만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 앞에서 완전히 당신께 나의 인도 하심을 맡깁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공급에 대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하나님의 집ㅡ교회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 체험이 많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쉽게 하나님 얼굴의 빛으로부터 나 자신과 일 가운데로 떨어져 간다. 심지어 모종의 상황을 산출하게 되는데, 즉 이 학교가 나의 운명, 이 교회가 나의 운명, 이곳의 청년들이 나의 운명이라고 삼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장막에 사는 사람이다. 나의 곳은 한 곳도 없다. 주여, 당신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렵니까? 어느 곳이 당신의 뜻입니까? 만일 이 길이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나는 이 길을 걷겠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가치가 있고,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는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의 생활은 참으로 하나의 큰 전기(轉機)가 필요하다. 우리가 아직 젊고 봉사를 배울 때  항상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장막을 치며 완전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인도하시는 길이 쉬워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장막 생활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헌신하고 주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제단을 쌓고 나서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느낌이 있기를 바란다. “주여, 당신께서 나를 여기에 하루를 놓아두시면 나는 여기서 하루를 충성하겠습니다. 나는 고난이 두렵지 않습니다. 주여, 나에게 하나의 집회를 주시면, 나는 이 집회 가운데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주여, 나에게 하나의 책무를 주시면, 열심히 그 책무를 다하겠습니다. 오, 주여, 만일 당신께서 나로 하여금 다른 곳에 가서 책무를 배우라 하시거나 다른 인도 하심이 있으시면 나는 그것을 따르겠습니다. 나는 결코 하란에 거하며 그의 아비가 죽은 후에서야 부르심을 들을 수 있는 아브람처럼 되지  않을 것이며, 장막 안에서 당신의 그 어떠한 인도 하심도 받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줄곧 하나님 안에서 길을 걷는 사람이다. 그의 길은 가면 갈수록 넓어지고, 가면 갈수록 크고 높아질 것이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의 좇음이 긴밀하면 긴밀할수록 더욱더 아름다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내가 어떤 교회에 속하고, 내가 어떤 봉사에 속하며, 내가 어떤  사역에 속한다는 느낌이 없기를 바란다. 또한, 여기의 몇몇은 나의 작은 양이다는 느낌도 없기를 바란다. 이것은 수치이다! 당신의 양이 아니다. 모두가 주님의 양이시다!

우리는 다만 단순하게 주님께 아뢰어야 할 것이다. “주여, 나는 장막 안에 거합니다. 당신께서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교제를 통하여 나를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날마다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집 그리고 당신의 교제 가운데 삽니다. 이러한 공급을 통하여 나로 하여금 한걸음 한걸음 당신께서 정하신 길로 가도록 하여 주옵소서. 주여, 나는 장막 안에 거합니다. 당신께서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십니까? 벧엘입니까? 세겜입니까? 아니면 헤브론입니까? 주여, 나는 다 가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넓어야 하고 안목도 멀리 보아야 한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이  넓고 커질 것이다.

하나님의 가르침

1. 천연적인 의지함을 제함

하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관계가 있으시다. 하나님께서는 하란에서 아브람에게 첫 번째의 가르침을 주셨다. 그의 아비는 하란에서 죽었다. 아비의 죽음의 영적인 의미는 바로 그를 낳아 주고 그가 존재하는 힘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의 아비는 그의 존재와 생활의 원인이었다. 현재 그의 아비가 죽었다. 그의 천연적으로 의지하는 능력이 죽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만이 우리의 천연적인 의지함을 제할 수가 있다. 우리는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공급하시고, 또한 끊임없는 가르침의 손길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많은 역경은 우리를 난처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한다. 왜냐하면  육신이 의존하고, 힘을 산출하는 것들이 모두 다 이 ‘아비’로부터 옮기는 동시에 제거되기 때문이다. 밖에서의 가르침이 있을 뿐 아니라, 안에서의 가르침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가르침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제한하시거나 그의 임재를 거두시거나 하신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우리가 의존하는 천연적인 것에 속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주님을 좇을 때에 우리는 쉽게 천연적인 것들을 의존하고, 자신의 재능을 의존하게 된다.  주님께 감사하자! 이럴 때 하나님께서 나오셔서 가르치신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길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방법을 의존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반드시 가르치신다.

2. 자신의 실패와 약함을 드러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두 번째의 가르침은 심한 기근이었으며, 그로 하여금 애굽에 내려가게 하시었다. 애굽에서 그는 거짓말을 하였고, 수치를 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 하심으로 많은 은 금을 얻게 되었다. 기이하다. 그의 실패마저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었다. 그가 애굽에서 돌아왔을 때 성경은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 금이 풍부하였다고 말한다 (창13:2). 그에게 원래 그 많은 재물의 축복이 없었다. 그가 기근을 만나 약하게 되어 애굽으로 내려가 마지막에는 축복을 안고 돌아온 것이다. 비록 그가 축복을 안고 돌아왔지만, 그는 세상의 축복이 다시는 그의 마음을 점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은혜 받은 사람에게는 기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신령한 일들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자주 이런 느낌들이 있을 것이다. “오, 내 안에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 안 되겠는 걸. 오, 교회는 최근 공급이 없어, 안 되겠는 걸” 이 모두가 영적 체험 가운데의 기근이다. 교회의 집회가 반드시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는 당신의 느낌에 불과하다. 또한  당신 안에 주님이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는 당신이 그분을 찾지 못할 뿐이다. 이럴 때  또 이런 상황에서는  당신은 “오, 주여, 다 내버려 두십시오. 나는  세상을 사랑하러 갈 것입니다.”라고 쉽게 말할 것이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래, 가거라!”하고 대답하실 것 같으시다. 그분께서 그렇게 말씀하게 되신 것은 당신이 세상을 사랑한 결과가 반드시 당신으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게 하고, 수치를 당한 결과는 필시 당신으로 하여금 축복을 받게 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주님을 찬미하자. 우리의 주님은 너무나도 크신 분이시므로 당신이 측량할 수 없다. 당신의 방법 과 수단으로 그분을 제한하지 말라. 아 브람이 애굽에 내려가는 것은 타락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는 타락하였다. 그의 시간은 주님에 의해 계산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돌아올 때에 그는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에 거하였던 벧엘로 돌아왔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육축과 은 금의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 축복들에 개의치 않은 것 같았다. 이 축복들은 그를 만지지 못하였다. 롯의 종들과 그의 종들이 서로 다투게 되자, 그는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13:8-9). 그가 축복을 받고, 또 다른 은혜, 즉 밖의 축복이 아닌 것을 얻게 되었다.  자기의 약함 때문에 수치를 당하고, 그가 수치를 당하므로 복을 받았다. 그가 복을 받았기 때문에, 밖에서 사람들을 이끄는 축복을 이길 수가 있었다.

기근은 아브람 자신을 드러나게 하였다. 그는 아브람에 불과했고,‘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두 개의 단을 쌓았지만, 그는 여전히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는 애굽에 내려가서 거짓말을 하였고, 거짓말을 한 후 그는 수치를 당하였다. 그는 수치를 당하였고, 다시 돌아와야 했고, 또한 원래 거하였던 곳인 벧엘에 돌아와야 했다. 그는 한 바퀴를 돌았다. 벧엘에서부터  떠나서 다시 벧엘로 돌아왔다. 그는 마치 많은 세월을 허송한 것처럼 보였다. 아브람의 이 부분의 체험들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아무런 성장이 없다고  보지만, 그러나 정말로 그에게 아무런 성장이 없었는가? 아니다. 그는 그전 같지 않았다. 그는 원래 은, 금, 소, 양, 낙타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땅을 아주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롯으로 하여금 먼저 그 좋은 것을 택하게 하였다. 정말로 기이하다. 당신은 사람의 성장이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또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므로 내가 좇게 되고, 하늘에 속한 경지에 사는 것만으로 생각하지 말라.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장하도록 이끄신다. 우리가 일어나 길을 갈 때, 때로 그분께서 우리의 실패와 약함을 허락하신다. 우리가 실패한 것 같지만, 우리는 다시 돌아오게 된다. 돌아오면 우리는 이 실패가 우리를 초월케 하는 것을 발견하고, 이 실패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를 다른 경지로 이끄신다. 또한,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근을 일으키셨고, 또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이 자기가 원해서 애굽으로 내려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의 환경을 일으켜 그로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셨던 것이다. 아브람 자신이 원해서 애굽을 떠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말씀하셔서 그로 하여금 애굽을 떠나게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 환경을 일으키셔서 그로 하여금 더 많이 하나님을 알게 하고, 더 많이 하나님을 얻게 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변케 되고, 초월하게 되었다. 그가 롯에게 이르되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이때의 아브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원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약속을 주셨다.

하나님의 약속ㅡ풍성과 깊은 체험 안으로 인도함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15).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아브람이 반드시 깊은 체험이 있어야 하며, 그 땅을 두루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을 것 같다. “네가 이전에 체험한 나의 공급은 오직 세겜과 벧엘 두 곳이었지만, 그러나 지금 나는 너를 일으켜 이 땅을 두루 다니게 하고, 너로 하여금 깊은 체험과 풍성한 누림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며, 너라는 사람을 변화시킬 것이다. 나는 너에게 새로운 생활을 줄 것이다.” 그렇다. 당신은 일어나 가야 한다. 오직 당신이 갈 때만이 당신은 그리스도가 진실한 것이라는 것과 우주의 유일한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당신의 발걸음이 때로 실패하고 약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다. 당신으로 하여금 약함과 실패 가운데서 하나님 자신이 바로 당신의 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공급이다. 이것이 바로 힘이다. 이것이 바로 머무는 곳이다. 이것이 바로 교제이다. 이것이 바로 이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풍성이 바로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통하여 그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끊임없는 발걸음을 통하여 이룰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얻기를 사모한다면 그분께서는 우리가 처한 상황 가운데 순탄하지 않은 느낌이 들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만족스럽지 않은 느낌이 당신을 억지로 앞으로 가게 하신다. 당신이 앞으로 나아가면 나갈수록 당신은 더 깊은 체험이 있을 것이다. “일어나서 이 땅을 두루 다녀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시다. 이 땅은 이미 당신에게 주셨다. 하나님의 풍성은 완전히 당신의 것이다.  일어나 다녀서 얻어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주권ㅡ 이기는 생활 안으로 인도함

아브람은 계속 앞으로 걸어가  하늘에 속한 경지인 헤브론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교제 가운데 살았다. 여기서 그는 사로잡힘을 당한 롯을 구하려고 제왕들과 싸워 이기고 돌아왔다 (창14:12-17). 이때에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을 통하여 그에게 한마디의 말씀을 하셨다. [천지의 주재이시요!] (창14:19)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이시다. 하늘과 땅에 대한 주권은 그분의 손안에 있다. 여기서 아브람의 이기는 생활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이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 지로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창17:20).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로 하여금 승리를 얻게 하셨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교제와 교제 가운데의 공급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기는 생활을 지낼 수 있다. 또한  이기는 생활 가운데 풍성한 체험들이 더 많이 있게 될 것이다. 그분께 찬송을 드리자!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의 승리의 나타나심이 있으시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주님이시었지 땅의 주님은 아니시었다 (비록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하여 이 땅을 다스리라 하셨지만, 아담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 이기는 생활이 있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위치를 얻으셨고, 천지의 주재가 되시었다. 이는 전체 성경 중에서 첫번째로 천지의 주재이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언급한 것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을 통하여 승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승리를 통하여 그분의 주권을 나타내신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주재이실 뿐 아니라, 땅의 주재이시기도 하다. 그분께서는 천지의 주재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앞에서 진실하게 “오, 주여,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 안에서 나의 일생의 길을 걷습니다. 나는 실패와 약함과 강건함에 주의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가 당신 안에서 길을 가는 것에만 관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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