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스케치 - 제 8 장

8

나를 따라오느라

ㅡ신약 안에서의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

언 약’시대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 택하 심과 부르심

노아 이후부터 하나님 사람에 대한 태도가 변하셨, 사람에 대한 요구도 변하셨. 노아 이전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소망을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벨, , 게난, 마할랄렐, 에녹, 므두셀라, 라멕을 얻으셨고, 또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사람을 얻으셨다. 하나님의 소망은 사람을 통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아 때에 이르자 사람은 혼합을 산출하였다. 혼합이 나타나자마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소망이 없는 것을 아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하게 여기시는 것이 바로 혼합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서는 흰 것을 좋아하신다. 또한, 검은 것 참으실 수 있다. 그러나 회색의 것은 참을 수가 없으시다. 당신은 주님의 것이 아니면 사탄의 것이고, 사탄의 것이 아니면 주님의 것이다. 당신두 발을 두 배에 놓을 수 없다. 하나님께 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혼합(회색의 것)이다. 하나님께 서 혼합을 보시면 바로 진멸하신다. 오늘날 하나님께서사람을 정결 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혼합을 제거하신다. 깨끗하지 않은 것들을 보시면 바로 오셔서 제거하신다. 이 때문에 홍수가 온 것이다. 홍수는 모든 혼합한 것들을 완전히 멸하였다. 마지막에 노아와 그 일곱 식구만이 남게 되었다. 노아는 깨끗하게 하나님 앞에 살았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사람에게 는 희망이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희망이 있으며 내가 와서 언약을 세우겠노라!”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우신 언약은 언제부터 시작 것인가? 노아 때부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인류는 하나의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였다. 원래 사람은 아담 안에 있었다. 그러나 오늘 사람은 노아의 언약을 체험한다. 하나님께서 는 아담 안에서 우리에게 요구가 있으시지만, 그러나 노아의 언약 안에서는 우리에게 요구가 없으시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르신 “내가 다시는 홍수로 땅을 멸하지 않겠다.”라는 뜻은 이러하시다. 사람이 얼마나 부패하거나, 얼마나 타락하거나, 얼마나 하나님께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또 하나의 길ㅡ생명의 길이 있다. 이 길이 나의 뜻을 이루어지게 할 것이다.

원래 하나님의 태도는 이러하시다. 사람이 옳지 않으면 바로 쫓아내는 것이다. 마치 아담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신 것과 같다. 또 가인에게도 떠나라 명하셨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러하시다. 사람이 옳지 않으면 떠나야 한다. 하나님 자신은 좋은 것만을 남겨 놓고, 좋은 것만을 쓰신다. 노아 때에 이르자 하나님께서 방법을 달리하시었다. 이후부터 사람을 쫓아내지 않으시고, 반대로 사람을 택하시고 부르셨다. 사람이 형편없을 지라도 떠나라, 떠나라, 떠나라 하시지 않으시고, 비록 사람은 형편없지만 오라, 오라, 오라 하시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형편없는 것을 보시더라도 떠나라 하시지 않을 것이고, 가인의 형편없는 것을 보시더라도 떠나라 하시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서 당신의 좋지 않은 것을 보시더라도 당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설령 지금의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형편없다 할지라도 오라! 오라! 오라! 하실 것이다. 당신이 잘못하였을 때에도 오라! 오라! 오라!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떠나라, 떠나라, 떠나라.’에서 오라, 오라, 오라.’로 바뀌시었다. 이는 무엇인가? 이는 언약시대의 특징이다.

현재 우리는 다시 아담 안에 있지 않다. 우리는 노아 안에 있다. 체험적으로 말할 때 현재 나는 아담 시대 안에 있지 않고, 노아 시대 안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으 로부터 “떠나라.” 하시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다만 “오라.” 하시는 소리만 자주 들리기 때문이다. 창세기 12장 이후부터는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오라 하시었다. 하나님께서 다시는 떠나라 하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오라 하시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노아 이후부터 하나님은 변하셨다.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에게 요구하셨을 뿐, 사람에 요구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떠한 기대 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 자신이 친히 완전한 책임을 지시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다시 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일을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주님을 찬미하자! 이는 실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주님을 좇는 길에서, 우리는 이미 다른 시대에 진입한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 시대는 언약시대이다. 이 시대는 다시는 아담처럼 하나님의 요구 가운데 살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함 가운데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책임진다, 내가 책임진다, 내가 책임진다.” 하시며 계속하여 증거하고 있으시다.

언약시대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은 바로 택하심과 부심이다. 그분께서 계속하여 택하심과 부르심 받은 자들을 온전케 하신다. 노아 이후부터 하나님의 주된 사역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건설적인 것이다. 그분께서 그 이후부터 적극적으로 하시는 사역은 바로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는 건축의 사역이다.

하나님께서 사람 택하심과 부르심의 배경, 그리 고 더 심한 배반

배반은 자아와 연결된다. 사람의 타락이 혼합을 산출한 후 사람은 완전히 자아를 위하며 산다. 창세기 114절은 말한다.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 사탄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사탄이 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이름이 높여져서 높은 자와 비기는 것이다 (14:13-14). 사탄의 배반은 그가 우주의 주재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에게 그런 뜻이 없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사탄의 배반이라고 생각해 왔다. 아니다. 사탄의 배반은 이보다도 더 심각하다. 사탄의 배반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나는 높은 자와 비기리라.” 이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에 사탄도 있을 것이고, 사탄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뜻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배반 가운데 사는 것이다. 이런 상황으로 떨어지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끝났다! 끝났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생명의 길과 봉사의 일에서, 배반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지 . 그것은 불순종이라고 한다. 또 배반 어느 날 “내가 하나님이 되겠다.”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도 아니다. 배반은 ‘나는 하나님과 동등하다.’라고 하는 데에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여, , , 일요일은 당신께 드리고 월, , , 금요일은 나 자신을 위해 남겨 놓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였면 생활 안에서 주님으로 하여금 주가 되시지 못하게 하는 종교적인 생활은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위치를 잃어버리게 한다.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께서 배반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느낌으로 살아가는 것을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 사탄이 하나님을 뒤엎거나 하나님 위에 있으려는 생각은 원래부터 없었다. 사탄은 다만 하나님과 동등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사탄이 이 말을 할 때 그는 끝난 것이다. 그는 천사장에서부터 사탄으로, 그리고 배반자로 변했다. 그가 그 말을 할 때 그는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떠났다. 사탄의 특징은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에 있다. 바벨탑의 특징도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드러남을 얻으려는 데에 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가 되시고 왕이 되시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나도 하나님과 같이 드러남을 얻어야 하고, 하나님과 같이한 몫을 가져야 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것 바로 배반이라 한다. 우리는 배반을 사람을 해치거나 화를 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아니다. 그것은 불순종이고, 우리의 연약함이며, 아담 안에 있는 죄의 성질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두렵지는 않다. 그러나 아담 안에 죄의 성질을 넘어, 영화 구경과 화내는 것들을 더 능가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당신 혼생명 안에 있는 자아이다. 그 ‘자아를 위함’의 자아가 배반의 근원이다. “주님, 당신께서 축복하여 주시면 나는 일을 하겠습니다.” 이는 무엇인가? 배반이다! “주님, 내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길을 얻게 하겠습니다.” 이는 무엇인가? 배반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권능에 복종하지 않았다. 주님으로 하여금 주권을 갖게 하시고, 오셔서 일하게 하시고, 책임을 지시도록 하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자신만을 위해 이름을 내는 것이다. 사람은 참 신기하다.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과 동등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앞에서 사역 가운데서 누림을 갖지 말라는 것을 언급하였다. 즉 그러한 누림도 역시 ‘자아를 위함’의 원칙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한 몫을 얻으시면 나도 한 몫을 얻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나의 누림을 가지시면 나도 하나의 누림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 서 그분의 이름을 내면 나도 곁들여서 나의 이름을 내어야 한다. 하나님께 서 하나의 보좌를 얻고자 하면 나도 하나의 보좌를 얻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나도 그것을 원한다. 이런 상황이 되면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일을 하실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오셔서 하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하셨다. 이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고 나온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등하려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얻어진 바 되고, 하나님의 권능에 복종했다.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분께서 그분의 언약을 기억하신다. 그분께서는 파멸을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분께서 징벌을 빌어 구원을 성취하셨다. 첫째, 그분께서 사람의 언어를 혼잡게 하여 사람들로 ‘교제’를 잃게 하므로 일을 못하게 하시었다. 다음은 그분께서 사람들이 아브람을 통해 복을 받게 하고, 그분에 의해 심판받은 모든 족속도 아브람에 의해 복을 입게 하. 하나님께 서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을 진멸하시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는 그들로 교제를 잃게 하시고, 다시금 벽돌을 굽지 못하게 하시며, 탑도 쌓지 못하게 하시었다. 그 결과 사람마다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오늘날 사탄이 이 비결을 몰래 가지고 갔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교회 건축하실 때에 우리로 하여금 교제를 잃게 하는 것이 최고의 파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그는 여러 방법을 사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같은 말을 하지 못하록 한다. 형제·자매들이 여, 연약함을 두려워하지 . 실패도 무서워 하지 . 오직 교제가 없는 것을 두려워하라. 만화에 빠진 것은 두렵지가 않다. 만화에 빠져서 형제·자매들과 교제를 하지 않 것이 두려운 것이다. 화를 내는 것은 두렵지 않다. 화를 내고 형제·자매들을 만날 용기가 없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서로 하나 된 교제가 없으면 교회는 건축이 없다.

하나님의 택하심 과 부르심의 방법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의 방법은 다섯 가지가 있다. 이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체험하여야 할 것들이다. 우리는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택하시고 부르시는 것을 보았다. 아브람의 일생은 바로 이 다섯 가지의 원칙 안에 살았다. 첫째는 다시 ‘태초’ 둘째는 그분의 나타나심을 통하여, 셋째는 그분의 부르심을 통하여, 넷째는 그분의 약속을 통하여, 다섯째는 그분의 크신 능력과 변치 않으심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심과 부르심을 통하여 한 사람을 그분 앞으로 인도할 때에는 대개 이 다섯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님께 서 한 사람을 얻는 데는 반드시 이 다섯 가지를 통하여서 하신다. 베드로를 예로 들자. 베드로는 어떻게 은혜를 입었는가? 그는 고기를 잡고 있지 않았는가? 후에 누가 와서 그를 찾았는가? 누가 시작하였는가? 주님이시 다. 주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다. 주 예수님이 그가 있는 곳에 가셔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밖에서 볼 때 주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이시었다. 그분께서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사람들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신분도 없으셨는데,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을 따르도록 할 수 있었는가? 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 나타나시자 (4:18) 베드로가 보았던 분은 다름 아닌 바로 영광의 주님이시었다. 주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베드로 안에는 주님의 특별한 가치가 심어졌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느라] 하고 말씀하셨다 (4:19). 이것이 바로 주님의 부르심이다. 베드로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았다. 주님께서 다시 베드로에게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셨 다 (4:19). 베드로는 바로 약속을 받았다. 주님께서 잡히시고, 재판받고, 순교하시 고, 베드로는 연약하여 실패하고 넘어지며 주님을 부인(否認)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주님의 지키심의 크신 능력이 있었다. 주님은 그에게 있어서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다. 모든 성도들의 주님의 좇음과 택하심과 부르심의 체험은 모두 이 다섯 가지에 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태초를 시작하시므로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게 하고, 주님의 사랑스러움을 보시게 한다. 또한, 주님의 부르심을 통하여 주님의 약속을 얻고, 주님을 좇게 된다. 이때에 우리에게 하나의 자신이 생겨, 그분의 지키시는 큰 능력과 그분의 변치 않으심을 체험한다.

1. 다시 태초

아브라함이 바로 그렇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있는 곳에 오셨다. 그것이 바로 태초이다. 창세기 1장에서 12장까지 많은 태초가 있다. 이는 우리의 일생의 체험 가운데 태초가 끊임없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매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태초로 시작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또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태초를 시작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찾는 마음을 갖게 하신 것이다.

2. 그분 의 나타나심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적어도 일곱 번이나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곱 번이나 나타나신 것은 그로 하여금 일생의 길을 가게 하고, 주님 자신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러분은 유의하여야 한다. 이 나타나심은 하나의 종교적인 것이 아니고, 밖의 영적 생활도 아니다. 이는 사람 안에서 주님을 확연하게 만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 오늘 집회는 아주 좋다. 나를 매우 감동시켰다.” 그의 말을 너무 믿지 . 그가 주의 길은 갈 수 있을지 모른다. 설령 길을 간다 하더라도 얼마 지속할지 모른다. 만일 그에게 이 다섯 가지의 원칙이 없다면 종점까지 갈 수 없을 것이다. 밖에서 말하는 “집회의 설교가 사람들로 만족게 했다.”라는 말은 소용이 없다. “형제·자매들이 서로 사랑한다.”라는 말도 소용이 없다. “성경 읽와 찬송이 너무 좋다”이것 또한 소용이 없다.

1)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없는 봉사는 탑을 쌓는 것임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길을 가게 하는가? 어느 날 하나님께서 태초를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참으로 기묘하다.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겠다는 생각과 주님을 좇아야겠다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날 기묘하게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한번 만지시자 당신이 감동된 것이다. 그 후로 당신은 주님이 너무 좋다며 이 길을 가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분은 유의하여야 한다. 집회가 아니고, 성경 읽기도 아니다. 또 교회 생활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도 아니다. 오로지 주 예수님 자신만이 사랑스러운 것이다. 당신은 그 느낌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노련한 형제·자매들처럼 주님의 사랑스러움을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 안에는 아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당신이 본 주 예수님은 너무나 사랑스러우시고, 당신이 본 주 예수님은 너무나 보배로우시며, 당신이 본 주 예수님은 너무나 좋으시다는 것이다. 어떻게 좋은가? 설명 할 수 없지만 정말로 좋다. 이때야 당신은 주님 앞에서 길을 잘 가게 될 것이다.

주님의 나타나심을 만져 보지 못한 봉사는 바로 탑을 쌓는 것이다. 당신은 탑을 쌓고 있는가? 당신 손에 있는 소위 봉사라는 것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고, 주님을 만지고, 주님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주님의 사랑에 격려되어 당신으로 하여금 주님은 참으로 좋으시고, 보배로우시 고, 사랑스러우시고, 실로 당신의 마음을 빼앗기에 당신이 이 봉사를 하게 된 것인가? 만일 이 나타나심이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주님의 길을 가지 못할 수도 있다거나 이 길을 떠날 수도 있다는 것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진실로 주님을 만진 사람은 그를 쫓아내어도 쫓아낼 수가 없다. 주님을 만진 사람은 어떠한 고생도 달게 받는다. 그는 많은 눈물을 흘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설령 그가 원치 않은 때에도 그의 안에 있는 무언가가 원치 않은 생각을 원하므로 바꾸게 한다. 어째서 그에게 이런 상황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시작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그를 만난 것이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그리스도인 생활을 즉시 다른 경지(境地)로 이끌어 간다.

어떤 때에 형제·자매들이 성막의 뜰에서 바쁘게 봉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보아라. 이방인도 바쁘다. 그의 바쁨이 때로 그로 하여금 자신이 아주 제법인 줄을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바쁜 결과가 그의 ‘자아’를 만족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의 교장과 주임 같은 사람들은 그들이 학생을 돌보는 일에서나 부하 직원들을 대하는 일에서나 많은 사람들이 하는 봉사와 같다. 그래서 당신은 봉사하였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집회를 흥분과 열기로 이끌었다고 해서 다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 봉사에 주님의 나타나심이 있으셨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주님의 나타나심이 없다면 길이 없다. 절대로 길이 없다. 주님께서 바벨탑을 쌓은 사람을 대하심과 같이 주님께서 주님의 나타심이 결여(缺如)한 사람들을 정결케 하실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입힌 뿌리는 바로 그분의 택하심과 부르심의 뿌리이다. 첫째는 그분의 시작함이시다. 모든 것이 그분께서 시작하신다. 그분의 시작함이 그분의 나타나심을 가져 오신다. 주님의 나타나심이 없으면 길이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종교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을 살아왔다면 이는 교장이나 주임이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이 ‘자아’안에서 자라 나온 것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교회 안으로 가져오지 말아야 한다. “나는 모 교회에 있다. 나는 모 교회에 대하여 특별한 부담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벨탑의 원칙이다. 주님의 나타나심이 모자라서 그렇다. 만일 당신에게 주님의 나타나심이 있다면 당신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주여! 당신이 제일이십니다. 주여! 당신이 제일이십니다.” 당신이 이렇게 말을 하게 되면 당신이란 사람은 변하게 된다. 당신이란 사람의 마음이 넓어질 것이고, 당신이란 사람의 안목이 넓혀질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 계신 주님이 당신 안에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얻지 못한 사람을 쓰지 말라

주님의 나타나심은 우리 전체의 생활을 통제한다. 주님의 나타나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별로 주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을 만났는지, 주님 앞에서 신선했는지만 주의를 기울인다. 많은 사람들이 성도를 섬길 때 성도의 집회 참석의 횟수가 많은지, 열심히 하는 모양이 있는지를 본다. 만일 그에게 그러한 것이 있으면 우리는 즉시 그에게 봉사를 주게 된다. 그 결과, 은혜를 입은 지 얼마 안 된 성도가 온전함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생명 성장의 체험도 없게 된다. 그는 오로지 일만 하고, 인수를 챙기고, 붐비는 것을 좋아하지만, 주님의 나타나심을 소홀히 한다. 유의해야 할 것은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식으로 봉사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성도가 하나님께서 ‘태초’하신 것이고, 그 성도에게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고, 하나님께서 그 한 사람을 얻으시고자 하는 것을 아는 신령한 안목을 갖기가 그리 쉽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안목에서 그 ‘사람’을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우리는 아주 쉽게 일의 필요함에 따라서 그 ‘사람’을 보게 된다. 그 결과, 한 사람 한 사람 다 쓸 수 없게 망쳐놓는다.

·고등부와 대학생의 인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람 안에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있지 않다. 이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있었는지, 즉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만나셨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얻으셨는지에 의거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얻지 못하셨다면 교회는 그 사람을 쓰지 말아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아무 일을 하시지 않셨다면 교회는 그에게 일을 주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손안에 잡지 않았다면 교회는 그를 사역 가운데로 데려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사람에게 행한 모든 인도와 봉사는 모두가 그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의거한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필요하지 모른다. “주여! 당신께서 먼저 우리에게 나타나시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행동을 뚜렷하게 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한 형제와 만나 그와 교통을 하면 그가 회막의 뜰에서 분주하고 있는지 아니면 확실히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았는지, 또는 그가 밖의 일을 하면서 자신의 취미 활동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확실히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마음 안에 심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한평생 주님을 따르는 데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시작 하심에 의거한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강할수록 당신은 길을 더 잘 가게 되고,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강할수록 당신은 주님을 따르는 데에 더 절대적일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완전히 나타나셨다면 당신이란 사람 전체가 그분 안으로 사라질 것이다. 당신은 주님의 길은 가는 데 어렵다는 생각이 없을 것이다. 당신은 아! 원래 이것이 바로 주님을 좇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많은 일 가운데서 나오게 되고, 많은 봉사 가운데서 나오게 되고, 많은 밖의 분주함 가운데서 나오게 될 것이다. 당신은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실로 주님의 긍휼이 필요하다. 주님께 우리에게 그분의 나타나심을 구한다.

2) 그분 의 부르심을 통하여

주님께서 나타나시면 부르심이 있으시다. 성경에서는 나타나심과 부르심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 서 나타나시면 말씀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나타나시면 그분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영광스러운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시면 바로 말씀을 하신다. 그분의 나타나심은 그분의 부르심과 연결되어 있다. 어느 날 주님께서 베드로에 다가와 베드로에게 나타나시자 베드로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그분을 좇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추가로 하셨던 “나를 따라오느라!”라는 한마디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바울이 큰 빛에 의해 땅에 엎드러진 후부터 날마다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을 누렸던 것이 아니고, 바울이 바로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라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22:10). 하나의 나타나심은 하나의 부르심을 가져 온다. 부르심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이시다. 즉 하나님께서 그분의 마음에 있는 말씀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그분의 마음에 있는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며, 그분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당신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한 면은 당신 안에서 무언가를 보게 되어 “주여, 당신은 아주 좋습니다.”라는 말이 나오게 한다. 다른 한 면은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을 알게 한다. 사람에게 주님의 나타나심이 있고, 주님 자신을 만지게 되면, 그 안에는 한마디의 말씀이 있게 된다. 이 한마디의 말씀이 있으면 그가 어떤 일을 하거나 또 어떤 상황에 있어도 그를 쫓아낼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이 아멘을 하지 않아도 그에게 요동이 없다. 설령 사람들이 여러 가지 권하고 분석한 말로 그 잠시 마음의 흔들림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가 다시금 주님 앞으로 돌아와 주님을 누리게 되면, 안에 있는 말씀이 다시 살아나 그의 마음을 변하지 않게 한다.

참으로 특별하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데는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렇게 하셨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람에 대해 하나님의 부르심은 두번째이다. 첫번째의 부르심은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한 간증 안에 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7:2-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그가 하나님을 만나니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에게 있게 되었다. 부르심이 있으면 약속이 있다.

4. 그분 의 약속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길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이것은 부르심이다.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7:3). 이것은 약속이다. 여기서 약속의 ‘땅’이 나온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가져 오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라, 오라, 오라” “가거라, 가거라, 가거라” 말하기를 원하신다. 참으로 통쾌하다. 통쾌한 것은 우리에게 계시는 한 분의 주님은 종교 안에 계시지 않고, 하늘 아주 멀리에 계시지도 않으시며,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는 것이다. 그분께서 시작하시고, 그분께서 나타내시고, 그분께서 부르시고, 또 그분께서는 하나의 약속이 있으시다.

5. 그분 의 크신 능력과 변치 않음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크신 능력과 변치 않음이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다 해서, 하나님께 서 나타내셨다 해서, 하나님께 서 부르셨다 해서, 하나님께 서 약속하셨다 해서, 이후의 길은 쉽게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 아니다. 당신은 우리가 바로 바벨탑을 쌓는 재료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오로지 바벨탑을 쌓는 데에 합당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아’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조금의 축복을 주시면 당신은 그것을 가져가 바벨탑을 쌓는다. 사람인 우리는 정말 성가시다. 비록 우리에게 하나님의 태초 하심과 나타나심과 부르심과 약속함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주님을 좇는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주님을 좇는 의지는 완전히 그분의 지속적이고 변치 않음에 따른다. 당신은 아브라함의 일생에서 적지 않은 연약함과 실패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나이가 지긋할 때 하나님께서 그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약속을 하시고, 아브라함 이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었다 (15). 아브라함 은 제사를 올리고, 하나님께 열납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랄 왕 아비멜렉 앞에서 아내 사라 (하나님의 은혜를 예표함)를 자기 누이라 칭하고, 사라를 아비멜렉에게 취하게 하였다 (20:2).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의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되신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사라를 사람에게 취하게 하였다면 후사는 어디에서 나는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니]라고 축복하시었고(12:2), 또 그를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축복하시었다 (22:17). 아브라함이 생각지도 못한 것은 그가 축복의 뿌리인 사라를 다른 사람에게 취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하마터면 주님을 좇는 데에 자신의 일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 주님을 찬미하자!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시고 부르셨으면 당신은 무서워할 것이 없다.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것은 당신이 그분을 만났느냐에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면 당신은 당신의 연약함을 무서워하지 . 비록 아브라함이 사라(사라는 이전 사래라고 함)를 사람에게 주었지만,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셔 아비멜렉이 사래를 가까이 못 하도록 하셨기에 사래가 지키심을 받았다. 그 후, 아브라함 은 아비멜렉의 집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내들로 하여금 생산케 하셨다. 그러나 그 당시 아브라함 자신은 아직 아들이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사람에게 일하실 수 있으시고, 실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을 좇는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이다. 하나님 자신께서 ‘태초’를 시작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타나심, 하나님의 부르심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함을 있게 하신 후 우리로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변치 않음을 있게 하신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변치 않음 통하여 그분의 책임을 영원토록 지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있으시다. 이 능력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생산케 하고, 이 능력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길을 가게 한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가는데 두 가지의 보호가 있다. 하나님의 측면에서 말할 때 그분께서는 변치 않으시다는 것이다. 우리의 체험적 측면에서 말할 때 그분께서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분 앞에 나아와 그분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으며, 그분께서는 계속하여 그분의 능력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능력과 지키심을 체험케 하신다. 그분은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고, 우리는 끊임없이 그분을 체험할 수 있다. 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 수가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 택하심과 부르심의 다섯 가지의 단계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 과 부르심의 목적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에 대한 약속에는 세 가지 중점이 있으시다. 그것은 땅, 민족 (중국 성경은 나라로 번역. 역자 주), 그리고 복이다. 첫째, 너는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12:1). 둘째,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지게 하고 (12:2). 셋째,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 (12:3).

, 민족, 복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그분 자신이 은혜를 입은 자들의 분깃- , 나안 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분 자신이 은혜를 입은 자들- 민족 위에 통치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뜻은 은혜를 입은 자들을 통하여 그분의 뜻-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음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심과 부르심의 목적은 완전히 그분의 뜻을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심과 부르심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의 택하심과 부르심의 근거가 되었다. 은혜를 입은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떠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믿음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것처럼 우리를 부르실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말씀을 하셨든지 간에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의 목적은 다름 아닌 바로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다.

1.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먼저 하나님께서 오셔서 당신의 분깃이 되신다. 은혜를 입은 자에게는 주님 자신 이외에 다른 분깃이 없다. 주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당신은 부르심을 받고, 그 땅으로 가야 한다는 것과 그 땅이야말로 당신의 분깃이다라고 생각하지 말라. 아니다. 그 땅은 그리스도이시다. 또 당신은 당신이 부르심을 받았다 하여 사도가 되고, 사도가 당신의 분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아니다. 사도의 실제는 바로 주님이시다. 주님이 없으면 사도도 없다. 주님이 없으면 사도를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은혜를 입은 자들의 분깃은 주님 자신이시다. 그 땅은 바로 주님 자신이시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너는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르셨다. 그 땅이 바로 가나안 땅이다. 그 뜻은 이렇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이후부터 네가 누려야 할 것, 체험할 것, 그리고 얻어야 할 것은 모두가 나 자신이다.’

주님께 감사를 드리자. 그분 자신이 우리의 분깃이기 때문에 그분께서 세상만사 만물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당신은 교회 생활 안에서 사람들의 느낌이 항상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매우 고양(高揚)되어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들의 연약함과 낙담과 어려움을 간증한다. 설령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낙담’을 당신에게 주시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고양됨’을 당신에게 주시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당신에게 주시지 않았고, 또 하나님께서 ‘형통’을 당신에게 주시지도 않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고양됨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얻게 하시고, 낙담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얻게 하시고, 어려움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얻게 하시며, 형통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얻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셔, 그분의 길을 가게 하시며 그분께서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네가 나의 길을 갈 때 나는 너에게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을 것이다. 만일 네가 나를 얻지 못한다면 너의 낙담은 헛된 것이고, 너의 고양됨도 헛된 것이고, 너의 어려움도 헛된 것이며, 네가 매 맞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매를 맞고, 이러한 고생을 하고, 이러한 낙담, 고양, 형통, 어려움을 체험하면서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얻어졌는가를 자주 주님께 물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의 목적은 그분 자신이 오셔서 우리의 분깃이 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얻었다면 모든 것이 족하다. 그러나 당신이 주님을 얻지 못하였다면 모든 것이 헛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의 손길을 아시게 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것이라는 것을 기억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하시는 일이 있으신,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는 너의 분 깃이다.’라는 것을 보시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다만 어려움만을 보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분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직히 말해서 낙담은 별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낙담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얻었냐에 있다. 당신 낙담하고 있을 때 주님께 이렇게 말해 본 적이 있는가? 주여, 당신을 찬미합니다. 비록 나에게 당신의 임재가 없지만, 그러나 나는 당신을 소유합니다. 비록 당신의 임재는 잃어버렸지만, 그러나 당신께서 나의 안에서 더욱 나를 주관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주님을 좇는 길에서 모두가 이러한 체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주님을 좇는 길에서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그리스도를 당신에게 주신다. 당신이 대가를 지불할 수록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더 많은 그리스도를 주신다. 하나님께 서는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분깃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는 그리스도 이외에 아무것도 당신에게 주시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것을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께 서는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우리에게 주신다.

2. 큰 ‘민족’을 이루고,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많이 주실수록 하나님께서는 더욱더 우리 안에서 주권 갖게 되신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으면 얻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하나님 손에서 쓰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조성면 조성수록 더욱더 하나의 민족의 상황이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한다.’라는 말씀을 하셨을 뿐 아니라, 그 후에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볼 때 그에게 하나의 민족이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23:6). 사람들은 그를 만날 때마다 하나의 민족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아브라함 안에 주님께서 주재하시는 권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영적으로 성숙한 형제·자매들이 일어나 교제를 하거나 앉아서 얘기할 때 그들에게 하나의 민족이 있는 것을 느껴 보았는가? 그러한 상황은 당신에게 주님의 권능이 그곳에 계시고, 주님의 흐름이 그곳에 계시고, 주님의 주권이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할 것이다. 우리는 젊을 때부터 주님을 앙망하여야 한다. “주여! 당신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실 뿐 아니라 당신을 더욱더 많이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사람들이 우리를 만날 때마다 하늘에 속한 권능을 만나게 하여 주옵소서” 이때야 비로소 모든 족속이 우리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된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비록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은 한 무리의‘사람들’을 버렸지만, 그분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사람’을 얻으셨다. 오늘날 하나님 사역의 특징은 바로 그분께서 간증으로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그분께서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 이후부터 나는 사람에게 소망을 두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나 자신에게만 소망을 갖는다. 무지개를 세워 내가 신실한 주라는 것을 사람들로 보게 할 것이다.”라고 선포하고 계신다.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시대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택하심과 부르심의 사역을 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들리는 것은 떠나라, 떠나라, 떠나라가 아니고 오라, 오라, 오라의 소리이다. 이제는 하나님께 합당하지 못하여 쫓겨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분의 나타나심, 그분의 부르심, 그분의 약속 하심, 그분의 보호 하심 그리고 그분의 크신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주님을 체험하므로 우리는 그분을 얻을 수가 있고,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통치할 수 있으며, 또한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영원한 뜻을 이루실 수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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