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지상에 서의 두 노선(2)
ㅡ새로운 신성한 언약의 시대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볼 것이다. 이 새로운 시대는 노아로부터 시작되었다. 노아 이후부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변했다. 노아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와 요구가 있으셨지만, 노아 이후부터는 하나님께서 오직 그분 자신에게만 요구하시었다. 노아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살고, 그분의 뜻과 목적을 이루며, 그분을 위해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을 기대하셨다.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 사람에게 하나의 분부가 있으셨는데,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행실을 바르게 하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아 이후부터는 달라지셨다. 다시는 사람에게 요구하시지 않으셨고, 오직 자신에게만 요구하시었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무지개로 그분의 신실함을 증거하신 것은 (창9:12-17) 앞으로 ‘그분’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 이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다시는 사람에게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께 서 그 이후로부터 그분의 계획의 실현은 오로지 그분의 신실함에 의거하고, 자신의 공급에 의거하며, 자신의 사역에 의거하여야 하신다는 것을 아셨다.
그 이후로부터 지상의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의거하는 것이지 결코 사람의 어떠함에 의거하지 않는다. 이제는 사람이 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어떠한 요구도 하시지 않는 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혹 노아의 시대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직도 창세기 초기의 상황에 머물러 있으면서 오늘 뱀이 나를 시험하 지는 않을까? 내가 뱀을 이길 수 있을까? 내가 아벨을 죽이지는 않을까? 나는 어떻게 제물을 바칠까? 하는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노아 이후로부터 하나님이 변하시게 된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께서 는 사람에게 다시는 요구하시지 않고, 그분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보살핌과 긍휼과 축복은 모두 다 그분의 신실함에 의거하셨다. 이것이야 말로 노아의 체험의 중심이다. 그 이후로부터 성도의 생활은 오직 하나님의 신실함에 의거해야만 했다.
세상의 노선 - 사람이 더 욱 깊게 타락됨
1. 혼합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그 결과 용사, 고대에 유명한 사람을 낳았다. (창6:1-4). 이는 혼합되어 나온 사람이다. 고대에 유명한 사람은 어떻게 나온 것인가? 바로 혼합되어 나온 것이다. 혼합을 하니 바로 용사라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이런 혼합은 하나님께서 가장 증오하신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바로 혼합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이미 ‘각 종류는 종류대로’를 선포하셨고, 이에 따라 각 종류는 각 종류에 속하였다. 그분께서는 ‘하나’이시다. 그분께서 얻고자 하시는 것도 단순한 ‘하나’이시다. 주님을 사랑하면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나, 하늘을 갖고 있으면서 땅도 가지려고 하는 혼합된 상황은 필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성도도 때로는 영 안에 있으면서 육체 안에 거한다. 영을 따라 봉사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방법에 의존하면서 봉사를 한다. 이것이 혼합된 원칙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이 혼합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 안에만 있는 것으로 이 길을 가는데 그리 쉽지 않을 것이고, 육체에만 의지하여도 이 길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가기 좋은 길은 영도 있으면서 육체를 더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용사라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 면은 ‘할렐루야’영이 충만하면서, 다른 한 면으로는 교회 가운데 사람을 만날 때마다 서로 무사히 지내려고 때로는 일을 도와줌으로써 사람들의 호감을 산다. 이것이 무엇인가? 혼합이다! 한 면으로는 기도하고, 다른 한 면으로는 어떻게 하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방법을 생각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혼합이다! 우리의 봉사에 혼합된 방법이 너무도 많다.
사람은 계속해서 타락해 왔다. 사람이 타락하여 그 고봉에 이르면 바로 혼합이다. 이런 타락은 아주 특별하기 때문에 쉽게 알아낼 수가 없다. 당신은 가인이 하나님에 의해 쫓겨난 이후 어디로 갔는지 기억하고 있는가? 에덴 동편이다. 그곳에서 유리(流離)하였다. 가인은 무엇을 하였을까? 생명나무를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을 뵐 수 없어서 하나님을 찾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의 타락은 쉽게 알아낼 수 있다. 매우 신기하다. 혼합된 상황은 사람의 영을 파괴하고, 하나님께 서 창조하신 그릇으로 하나님을 담을 수 없게 한다. 밖으로 볼 때에는 그럴싸하게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아무런 소망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을 노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해를 가하면서 하나님의 저주를 가져 오게 한다. 하나님께서 왜 천주교를 심판하시는가? (계17:1-6) 그것은 천주교가 하나의 대 혼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밖의 용사, 유명한 사람들을 보지 말아야 한다. 밖의 성과를 주목하지 말아야 하고, 인수도 보지 말아야 하며, 사람의 칭찬도 바라서는 안 된다. 다만 당신 안에 당신과 주님 사이에 어떤 상황인가를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 길을 가기는 쉽지 않지만, 구원을 입는 길이다. 전에 교회가 물질이 매우 빈곤하였을 때 어느 동역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만일 우리가 성도들의 헌금에만 의존한다면 아마 물도 마실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우리에게 하나의 자랑이 있었는데, 그것은 금과 은과 보화는 우리에게 없었지만,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웅장하고 용맹한 기상인가! 오늘날 우리는 담대히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가 빌딩을 짓고, 심지어 더 많은 빌딩을 짓더라도 (빌딩을 짓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 결과가 우리로 하여금 금과 은과 보화만을 나타내게 하고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게 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리스도 를 잃게 되면 당신은 밖으로 의지(依支)할 수 있는 것들을 찾게 된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밖의 것들을 당신의 의지로 삼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원칙으로 오늘 주님을 섬기기를 배우는 우리에게도 하나의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주의할 것은 밖의 나타난 것에 의지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밖의 환경은 매우 빈곤하여도 우리의 소유를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밖의 환경이 매우 풍족하더라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부족하면 전력을 다하여 밖의 방법을 찾게 되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예배당을 지을 수 있을까? 어떠한 방법과 수단으로 복음을 전할까? 어떠한 애찬으로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까? 등등이 모든 것이 혼합이다. 일단 혼합이 있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의 손은 즉시 떠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이다.“여기서는 길이 없다. 내가 사람을 얻는다면 나는 매우 깨끗하고, 백 퍼센트 나만을 위하는 사람을 얻을 것이다.” 청년들은 처음 시작부터 ‘혼합’을 주의하여야 한다. 단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사람에 불과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결혼하면 낳을 자녀가 바로 용사라 유명한 사람인고로 이름을 낼 수 있다. 또 나에게는 사람의 방법이 있으면서 하나님의 방법도 있고, 봉사를 하면서 설교도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이것이 혼합이다. 복음 집회에서 20명이 침례를 받았다고 해서 우리의 영광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는 우리가 단순한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인수를 위하여 침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라면 날마다 침례를 주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향해 매우 단순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즉 주님 이외의 것들을 갖지 않는 마음이다. 주님 이외의 것들을 갖지도, 말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주님께 의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주님에 의해 쓰임 받게 된다. 주님께 속하면서 세상에 속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주님도 얻고 세상도 얻으려고 한다. 봉사 가운데 자신의 능력도 있고 주님의 능력도 있다. 주님의 사역 가운데 자신의 공급도 있고, 주님의 공급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조만간 길을 갈 수 없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유의하여야 한다. 특히 젊을 때부터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만일 기회가 되면 교회 안에 영적인 형제에게 질문해 볼 수 있다. “여러 해 동안 주님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넘어진 사람을 얼마나 많이 보셨습니까? 누가 아직 주님 앞에 남아 있고, 누가 타락했습니까? 누가 주님 앞에서 먼저 시작을 하였고, 그 후에 차츰 내려앉았습니까? 누가 아직 교회에는 남아 있지만, 기능을 상실하였습니까?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까? ”나는 그들이 주님의 보혈 아래서 겸손히 이렇게 간증할 것으로 믿는다. “이는 전적으로 젊었을 때 혼합된 상태에 있었는지와 마음을 단순히 가졌는지에 근거합니다. 교회 안에 구변도 있으면서, 은사도 있고, 방법도 있는 형제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이 깨끗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길을 가다가 중단하고 다른 길로 흘러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짧은 설교를 좋아한다. 집회 가운데서 성경의 독후감을 발표하기를 좋아하거나 다른 사람의 교통이나 간증에 이어 끝맺음하기를 좋아하거나 큰 형처럼 넷 다섯 젊은 성도들을 가르치기를 좋아한다.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장 시험받게 하고, 깨끗하지 못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하기 좋아한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면서 주님 앞에서 작은 이익도 챙기기를 좋아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을 할 때마다 ‘나’를 반드시 강조한다. “아이고, 형제여, ‘나’는 바빠서 죽겠다!” 제발 이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 이것은 깨끗하지 못하다. 어떤 형제는 그가 매우 바쁘다는 얘기를 당신에게 하더라도 조금도 그가 자랑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의 ‘바쁨’이 사람들에게 그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가 응당히 그렇게 바빠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나는 아주 바쁘다”라는 말을 할 때 그 바쁨이 그의 자랑이다. 교회 가운데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자랑이다. 교회 안에서의 지위는 바로 그의 자랑이다. 이러한 사람이 길을 갈 때에 잘못 가게 된다.
젊었을 때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유의하여야 한다. 우리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러한 일들을 유의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깨끗하여야 한다. 심지어 우리의 깨끗함이 오직 주님만을 필요로 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필요로 하는 정도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주님 외에는 상관할 것이 없고 보배로워 할 것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딸을 취한 결과는 어떠한가? 용사, 유명한 사람이다. 좋다. 당연히 좋다. 큰 힘을 가진 사람 너무도 좋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육체가 됨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창6:3). 그들이 종일 생각한 것은 죄악뿐이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도 이 땅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창6:3,7).
2. 육 체가 됨
혼합의 결과는 사람으로 하여금 육체가 되게 한다. 육체는 부패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 혼합은 분명히 문제를 일으키고, 단순함은 교회로 하여금 건축을 얻게 한다. 주님 앞에 단순하지 않은 사람은 쓰임 받지 못한다. 은혜 받은 연수와 상관없이, 오직 주님 앞에 끊임없이 하나의 특별한 은혜 입기를 원하는가에 달렸다. 그것은 잘못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고, 단순하지 않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일은 잘못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하였다면 마지막에 교회로 하여금 건축을 얻게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 안에 ‘나’를 위한 어떠한 계교(計巧)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즉시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이 사람은 육체가 되므로 나의 영은 영원히 그의 안에 거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은 나와는 끝이다. 이 사람은 나의 손안에서 쓸모가 없다. 이 사람은 내가 제조할 수 없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혼합되었기 때문이다. 혼합하면 육체가 산출된다. 육체가 있게 되면 하나님의 영이 사라진다.
정말 신기하다. 흑암에 있을수록 더욱 어둠에 있게 된다. 누구든지 갑자기 흑암으로 변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흑암은 차츰차츰 찾아온 것이다. 혹 어느 날 어떤 형제가 미국에 다녀오는 것을 보고 나도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니다. 미국에 가는 것은 주님의 인도가 있어야지 어떤 형제가 갔다고 해서 당신도 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당신도 당신이 미국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즉 어떤 형제가 미국에 다녀오고 새로운 성장이 있었고, 특별 집회도 인도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나도 주님을 잘 섬기기 위하여 미국에 다녀 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혼합이다. 이 혼합은 불과 첫 번째 단계다. 차츰차츰 두 번째 단계에 이르게 할 것이다. 즉 육체가 되는 것이다. 당신의 두 번째 단계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당신이 미국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정직하지 않으면 미국에 가더라도 쓸모가 없을 것이다. 당신이 미국에 도착하고 나서 다른 사람이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을 보고 차츰차츰 당신도 박사 학위를 얻으려고 학업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세상으로 빠져 들어가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집을 사면 당신도 사야 할 것이고, 다른 사람이 좋은 자동차를 가지면 당신도 갖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이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면 당신도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 당신은 끝난다. 결국에는 육체의 사람이 된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 당신에게는 단순함이 필요하다. 만일 당신이 단순하지 않으면 반드시 육체가 될 것이다. 처음은 조금씩 움직이지만, 나중에는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발짝 한발짝 내리막길을 걷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내가 여기서 계속 집회를 하지 않았는가? 나는 지금까지 교회 생활을 해 오지 않았는가? 지금의 나는 매우 좋지 않은가? 그렇다. 당신은 아직 교회 생활을 하고 있지만, 당신은 당신의 마음이 이미 저택에 가 있고, 자동차에 가 있고, 사업에 가 있고, 학위에 가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당신의 마음은 벌써 주님으로부터 떠났다. 육체가 된 것이다! 갑자기 ‘펑’하면서 넘어지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넘어짐은 다시 쉽게 일어설 수 있다. 그 느낌이 가득할 것이다. 화를 내고 즉시 죄를 자백할 것이다. 사람을 상하게 한 후 바로 느낌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넘어짐은 그다지 무섭지 않다. 두려운 것은 혼합되어 산출한 넘어짐이다. 그것이야말 로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혼합된 사람은 하루하루 멀리 비켜나간다. 그는 원래 아주 깨끗한 곳에서 주님을 위해서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그의 마음이 조금씩 요동하고 다시는 주님을 좇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주님으로부터 멀리 비켜나가게 되므로 결국에는 육체가 되었다. 어느 날 그는 마침내 그 사실을 발견했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그가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 늦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그의 청춘이 이미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전력할 시간들이 이미 지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기능이 상실되었고, 쓸모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판정은 매우 엄정하시다. 그 결과는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이다 (창6:3). 그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부담은 모두 사라진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있어야 할 그의 분깃을 다시 자라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혼합은 절대로 안 된다. 혼합을 하면 끝이 난다. 혼합을 하면 육체가 된다. 육체가 되면 주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아니 하신다. 우리는 실로 주님의 긍휼이 필요하다. 우리는 젊을 때부터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때에 우리의 마음이 많은 일에 빼앗기지 않게 하므로 주님 이외의 것에 혼합되어 ‘용사, 고대에 유명한 사람’을 산출하여 주님의 심판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3. 온 종일 마음의 생각이 모두가 악임
혼합은 육체를 가져 온다. 육체는 사상(思想) 안의 악을 가져 온다. 악은 무엇인가? 악은 바로 그리스도 이외의 것이다. 그리스도 밖에서 생각한 모든 것, 즉 나는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공부하면 진학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하면 밝은 앞날을 기약할 수 있을까? 등 등이 모두가 악이다. 육체가 된 사람은 온 종일 마음의 생각이 모두가 악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는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떠나게 된다.
생명 노선, 다시 하나님의 뜻에 근거함
1. 마 음에 근심, 다시 ‘태초’가 시작함
창세기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손을 놓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떠한 실패를 하였든 간에 심지어 사악한 영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도, 하나님께서 는 그곳에 계시면서 손을 놓으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아무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친히 나오셔서 “나의 일을 하노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나는 너를 통하여 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을 빌어 그 뜻을 이룰 것이다. 나는 나의 뜻에 따라서 나의 일을 이루어야겠다. 나의 모든 일은 나의 뜻을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이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나오셔서 일 하신다.
[여호와께 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6:5-6).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실패한 것을 보시지 않으신다. 느낌으로는 죽어도 마땅하다, 홍수로 매몰시켜 버려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다.그러나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상태를 보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하셨다. 사람이 타락하면 하나님께서는 근심하신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은 기이하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은 부득이한 것이다. 당신의 순탄치 않음을 하나님께서 채찍질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이 나를 다스리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책망과 다스림은 조금 다르다. 하나님께 서는 사람을 자주 책망하시지 않으신다. 당신이 그분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는 곳이 있다고 해서 그분께서 당신을 중히 채찍질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마음이 근심하여 사랑의 손으로 당신을 다스리는 것이다. 매번 당신에게 문제가 있고 당신이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떠나면, 그분의 마음이 근심하게 되신다. 그분께서 근심하시지만, 손은 놓으시지 않으신다. 그분께서 다시 태초를 시작하시고, 다시 일을 시작하신다. 우리는 앞에서 여덟 종류의 사람을 언급하였다. 에노스부 터 노아까지,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 체험의 여덟 가지 상황을 말한다. 너무나 영광스럽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사람은 다시 타락하였다. 하나님의 마음이 근심하게 되었고, 그래서 다시 일을 시작하셔서 그의 마음의 뜻과 합하지 않은 것들을 제하시고 생명만을 남게 하신다.
2. 노아 로 하여금 생명 안에서 은혜를 입게 함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
1)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함
노아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게 된 것은 그가 묵시를 보거나 큰 우뢰의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라 오직 생명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서 정하신 큰 일들은 모두가 생명 안에서부터 산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회복은 모두가 생명 안에 있다. 노아는 줄곧 생명 안에 사는 사람이었다. 노아가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두 가지 요점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을 하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기름부음 받는 것을 배우지 않고, 영안에서 주의 이름 부르는 것을 배우지 않고, 주의 교통 안에 살기를 배우지 않는다면 사람인 우리는 반드시 연약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사역하고, 적극적인 간증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말씀이 없으면 사역을 할 수 없다. 살아 있는 말씀이 없으면 서 있을 수 없다. 당신이 사역을 하고, 봉사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반드시 살아있는 말씀이 있어야 한다.
2) 노아에게 살아 있는 말씀이 있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오셔서 길이가 삼백 규빗, 넓이가 오십 규빗, 높이가 삼십 규빗 그리고 상. 중. 하 삼층으로 나누는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다. 이는 정말 기이하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신 말씀은 그의 마음 깊은 곳까지 닿았고, 그가 듣고서 흘러 버리지 않았다. 노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말씀을 들은 후 그 말씀이 그의 일부분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이 있지만, 살아 있는 말씀이 아닐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말씀이 있지만, 그 말씀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할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이 있지만, 그 말씀이 우리의 생명 공급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회복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무엇으로 노아를 얻으셨는가? ‘살아 있는 말씀‘이다. 살아 있는 말씀이 그에게 임했을 때 그에게 생활의 활력과 생활의 실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명의 일부분이 되었다.
성경의 기록은 매우 기묘하다. 노아가 셈과 함과 야벳을 낳은 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명하여 방주를 짓게 하셨고, 노아는 방주를 지었다. 시간이 마치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큰 방주는 수년간 걸쳐져야 지어진다. 여러 해 동안 노아는 믿음 가운데 견뎌야 할 비웃음이 얼마나 많은지는 사람들이 상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는 묵묵히 방주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였을 것이다. 베드로후서에서 노아는 오직 의를 전파하였다고 말한다 (벧후2:5). 노아는 한면으로 방주를 지으면서 다른 한면으로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권면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서 홍수로 이 세대를 덮어 진멸하실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통제함
왜 여러 해 동안 오해받고, 비웃음들을 감수해야 했는가? 그것은 노아 안에 살아있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노아 자신 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도 통제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된 것이 아니다. 말씀이 당신 안에 살아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과 나는 단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살아있는 말씀이 있는가? 당신과 나는 혼합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살아 있는 말씀이 있는가? 살아 있는 말씀이 있다면 우리는 변하게 될 것이다. 살아있는 말씀이 없다면 성공도 잠시에 불과하고, 조금 지나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마치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살아 있는 말씀에 근거한 것처럼 일단 구원 받으면 영원히 변치 않는다.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받지 말라고 하여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안에 영존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연약하고 실패를 하므로 마치 구원받지 않은 사람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러나 주님 믿는 일을 만지게 되면 그는 바로 다시 살아난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만진 사람은 단지 단순함을 말하고, 절대적임을 말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단순하지 않을 때마다 단순함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나온다는 것이다. 주님께 절대적이지 않을 때 그 안에서 절대적이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는 것이다. ‘말씀’이 그 안에 심겨졌고 그 사람을 통제한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말씀이다. 주님을 좇는 우리는 항상 주님께 “주여! 나에게 항상 살아 있는 말씀을 주옵소서! 나는 살아 있는 말씀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살아 있는 말씀은 밖의 사람을 연약게 하고 속 사람을 강건케 한다. 살아 있는 말씀이 아니면 속 사람을 강건케 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밖의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케 한다. 어떤 사람은 “나는 당신이 한 그 말을 들었소”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살아 있는 말씀이 없다.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은 바로 그에게 살아 있는 말씀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나는 당신이 한 설교를 이전에 들은 적이 있소”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당신은 죽은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을 모른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조차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알려 주어야 한다. 당신에게 영이 없으면 실제가 없다. 만일 당신에게 영이 있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 안에 살고 있다면, 당신은 많은 메세지를 인증할 것이고 교만하지 않을 것이다. 밖의 지식이야말로 당신을 자만케 한다. 당신에게 살아 있는 말씀이 있을수록 자신이 무능한 것을 알게 되고, 당신에게 살아 있는 말씀이 있을수록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모든 것이 당신 안에 있습니다. 당신 안에 있습니다!” 지식만 있고 살아 있는 말씀이 없으면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오늘날 많은 젊은 사람들의 어려움은 영적인 지식이 너무 많고, 살아 있는 말씀이 적다는 데에 있다. 젊은 형제 또는 자매가 아주 자신 있게 “내 느낌은…” “내가 보기에…”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과연 ‘느낌’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그는 누구인가? 그는 과연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가? 그는 주님을 얼마나 많이 거쳐 갔는가? 그에게 진정으로 그 많은 ‘느낌’이 있단 말인가? 감히 이 인도는 맞는 것이고, 그 인도는 맞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너무 두렵다. 정말로 두렵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은 적고 오히려 지식이 너무 많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없으면 사람이 교만해진다. 젊은 나이에 얕은 영적 도량(度量)으로 교회와 사역에 대하여 어찌 감히 의견을 발표하고 비판을 가하는가? 살아 있는 말씀이 없으면 사람이 무지(無知)하게 된다. 살아 있는 말씀이 없으면 사람이 육체가 된다. 살아 있는 말씀이 없으면 사람이 교회의 어려움이 된다.
4) 살아 있는 말씀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임
노아는 여러 해 동안 주님을 섬기고 사람의 핍박과 오해를 견디면서 오직 한가지 일만을 하므로 매우 어렵고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만일 오늘날 당신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방주를 예비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홍수가 이 세대를 침몰시키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믿겠는가? 당신은 그 사람의 말에 따라 방주를 짓겠는가? 당신은 아마 자신을 혼합하여 만일에 대비하여 높은 곳에서 사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산꼭대기로 이주하지 않았고, 자신을 위해 계산하지도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방주를 지었다. 하나님께서 또 그에게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라]고 이르셨다 (창7:2). 이는 정말 불가사의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그에게 임하므로 그것이 가능한지 아니면 불가능한지 또는 맞는 것인지 아니면 틀린 것인지를 묻지 않았다.
만일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있다면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아주 특별한 일들을 하게 하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기꺼이 드릴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 살아 있는 말씀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 이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통제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살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한다. 다만 하나님과 동행하며 날마다 영을 훈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항상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있어야, 우리를 적극적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할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날마다 영을 훈련하는 것은 뿌리이다. 이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당신을 적극적이고 완전한 이해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줄 수 없다. 예를 들면, 우리는 자신들을 자주 죄의 괴수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은 진정 괴수인가? 만일 어느 날 공개적으로 당신을 괴수라고 지적했을 때 당신은 순복할 수 있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진실로 당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원래부터 몰랐다. 만일 우리의 상황이 진정 우리가 드린 기도 “주여,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만유이십니다”와 같으면 교회에는 많은 어려움들이 사라질 것이다. 교회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당신과 나에게 ‘있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몇 사람이나 진정으로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과 나는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다. 어느 날 당신에게 빛이 오게 되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 주님 나는 내가 이렇게 악한지를 전혀 몰랐습니다. 주여! 나는 내가 이런 사람인 줄 전혀 몰랐습니다. 주여! 나는 내가 이렇게 당신을 섬기고 있는 줄을 전혀 몰랐습니다.”
어느 날 웟치만 니 형제님을 뒤에서 욕하는 것을 보고, 형수가 그에게 알려 주었을 때 그는 “형수님, 나는 그들보다도 더 나쁘게 얘기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변박도 없고 불평도 없다. 원망도 없고 변명도 없다. 오늘날 당신과 나는 모두가 이러한 하나의 기도가 필요하다. “주여, 우리는 진실로 우리를 측량하는 당신의 살아 있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한걸음 한걸음마다 당신의 살아 있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끊이지 않는 살아 있는 말씀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다.
3. 하 나님의 말씀은 그의 생활임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노아에게 임할 때 노아를 통제했다. 오늘날 사람들이 헌신한다는 쪽지를 쓰고 전시간 봉사를 하겠다고 해서 전시간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령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의 통제와 제한과 공급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번은 백 이십명이 모인 특별 집회 가운데서 성령께서 행한 아주 기묘한 일들을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집회 중 한 형제가 일어나서 “우리는 아주 큰 관(棺)을 만들어 백 이십명이 함께 매장됩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참으로 좋다. 집회 가운데, 성령께서 강하게 운행하시므로 사람들을 울게도 하고, 주님을 만지게도 했지만, 그러나 끝날 무렵에는 주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오직 일부분의 사람들에게만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없는 것 같았다. 주님의 말씀이 있다면 달아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이 없다면 얼마 멀리 가지 못한다. 그때의 백 이십 명의 전사 중 어떤 사람은 지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기이한 것은 사람들이 일주일 동안 집회에서 웃고 울었는데도 마지막에는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사람은 주님에 의해 얻어졌다. 이러한 사람은 주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있은 후로부터 그리스도와 교회 이외에는 그 무엇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주님이 그의 생명이 되시고, 교회가 그의 생활이 되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생활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4. 결 국은 하나님의 마음의 뜻을 이루어지게 함
창세기 6장 16절: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창은 전체 구약 성경에서 모두 스물두 번이나 사용했다. 사람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 안에 살아갈 때에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는 광채가 발산할 것이다. 이를 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아래와 같은 체험들을 할 것이다.
1) 죽고 부활함
아라랏산은 영적으로 부활이란 뜻이다.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다는 것은 부활의 산꼭대기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2) 지난 체험을 잊고, 신선한 생명 안에 삶
이치로 말한다면 노아는 홍수 이후에 ‘방주 기념관‘이란 하나의 기념관을 세워야 했을 것이다. 그 첫번째 이유는 그가 방주를 위해 여러 해 동안 수고를 하고, 심혈을 기울였으 며 또한 그 방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두번째 이유는 전체 인류와 모든 피조물들이 이 방주를 통하여 구원을 얻었다.방주가 없었다면 인류는 없다. 방주가 없었다면 공중의 새도 없고, 육축도 없다.이 방주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 만일 방주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뜻은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이유이다. 이 세 가지의 이유를 위해서라도 노아는 하나의 기념관을 세워야 했을 것이다. 기념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그로 하여금 영광을 받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아는 지혜롭지 못하여 이 점을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만일 이러한 기념관이 세워졌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참관하여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으므로 좋은 간증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좋은 체험이었겠는가! 그러나 애석하다. 이 방주는 성경 가운데서 가장 좋고 높은 체험 중의 하나의 체험이다. 그러나 결과는 방주가 다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방주가 아라랏 산꼭대기에 머무른 후에 성경은 다시 방주를 언급하지 않았다. 혹 노아가 방주를 불로 태웠거나 하나님께서 태우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방주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에 있는 성경 말씀을 읽어 나갈 때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린다. 여기에 있는 이 사람은 실로 신령하다. 그에게 부활의 체험이 있은 후 가장 먼저 나타난 하나의 상황은 그가 보배롭게 간직한 체험들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간증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혹 그가 간증하였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 속에는 그 간증을 보배롭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 자신을 가장 보배롭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체험들을 보배롭게 여긴다.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얘기하고 또 얘기 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체험들로 다른 형제들을 측량한다. 마치 오직 자신의 체험만이 하나님의 행동하심인양 생각한다. 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 그러나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 노아는 방주로부터 나온 후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다. 방주는 그날로부터 사라졌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주여, 오직 당신만이 사람을 아주 깊이 연단하여 당신의 뜻에 일치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만이 사람을 높은 경지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신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뿐입니다!”우리는 이러한 체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난 체험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전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셨던 축복은 우리로 하여금 그 축복 위에서 앞으로 계속 더 전진하라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또한 노아는 신선한 생명의 체험 가운데서 살고 있었다. 홍수가 땅에서 사십 일이 지나자 노아는 먼저 까마귀를 내어 놓았다. 까마귀는 사망과 관련되어 있다. 죽은 것을 먹기 좋아한다. 까마귀는 물 위에 떠오른 수많은 사람과 짐승들의 시체를 보고 너무 즐거워서 방주로 돌아가는 것을 잊었을 것이다. 이는 방주 밖에는 죄악과 흑암과 사망이 가득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어서 노아가 비둘기를 내어 놓았다. 비둘기는 거룩한 것으로 사망과 더러운 것을 묻히기를 싫어한다. 비둘기는 온 지면에 물이 있고, 그 위에 곳곳에 널려져 있는 시체들로 인하여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여 방주로 돌아왔다. 노아는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 놓아, 저녁 때에 비둘기가 입에 [감람 새 잎사귀](창8:11)를 물고 돌아왔다. 이는 노아의 홍수 이후의 생활을 말해 주고 있다. 노아의 홍수 이후의 생활의 원칙은 바로 이 [감람 새 잎사귀]이다. 그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였다. 홍수 이후로부 터 그는 완전히 새 창조 안에 살았다. 모든 옛 창조를 제거하였고, 몸의 깨끗하지 못한 것들을 모두 없앴다. 그에게 하나의 새로운 상황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부활이다. 완전히 신선한 생명 안에 살았다. 어제의 만나를 먹지 말라. 어제의 만나는 오늘의 감람 새 잎사귀가 아니다. 날마다 주님께 “주여, 나는 감람 새 잎사귀가 필요합니다”라고 고해야 할 것이다. 혹 이 방주를 통해서 많은 귀한 체험들을 얻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가장 보배롭게 여기는 것은 오히려 이 감람 새 잎사귀이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끊임없는 인도하심’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지난 체험들을 개의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신선한 생명 안에 살아야 한다. 날마다 신선하고 활발한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신선함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으 로 하여금 그분께서 얻고자 하시는 것을 얻으시게 해야 할 것이다.
서 살고 있었다. 홍수가 땅에서 사십 일이 지나자 노아는 먼저 까마귀를 내어 놓았다. 까마귀는 사망과 관련되어 있다. 죽은 것을 먹기 좋아한다. 까마귀떠 오른 수 많은 사람과 짐승들의 시체를 보고 너무
3) 하나님 마음에 품으신 뜻을 이루시도록 함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자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었다. 하나님께서 는 사람의 제사를 누리신다. 한면으로는 보시고, 또 한면으로는 맡으신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올 때 그는 부활의 위치에 서 있었고, 다시 한번의 헌신이 있었다. 그가 다시 헌신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제사의 향기를 맡으시고, 그에게 이르셨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8:22). 이전에 하나님께서 증오하시는 것은 지나갔고, 지금 다시 ‘태초’를 시작하시었다. 홍수 이후로부터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이다. 창세기 3장에서부 터 읽어 내려가면 갈수록 깊어지고 높아지면서 마지막에는 신선한 부활 생명 위에 끝맺음을 한다.
하나님께서 다시 그분의 뜻을 견고케 함
1. 사 람의 좋고, 그름에 의거하지 않음
비록 사람은 대적에 의해 파손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방법이 있으시다. 사람이 한번 실패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방법이 있으시고, 다시 실패를 한다고 해도 그분께서는 여전히 방법이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사람을 심판하신 후 단언한 한가지 일은 바로 그분께서 사람에게 하시는 일을 다시는 사람의 좋고, 그름에 의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세기 9장의 끝에 가서야 노아가 농부가 되었다는 내용과 그가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은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 이런 일들을 기록함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실 수 있다는 것을 예표하기 위해서다. 또 사람에게 행하시는 일은 사람의 좋고, 그름에 의거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존중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전에는 사람에게 요구가 있으셨다. 창세기 2장 17절의 […… 먹지 말라]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인도하시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 서 사람을 인도함에 있어 원래는 인도에 따른 요구가 있으셨다. 즉 내가 어떠하니까 사람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이제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하시고, 또 사람을 꿰뚫어 보시므로 다시는 사람에게 요구하시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얼마나 부패한다 하더라도 원래 모습대로 단순한 아이처럼 그분 앞으로 나와 그분의 긍휼을 구할 수 있다. 이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대이다.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책임이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책임을 담당하신다.
우리가 모두 이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짐은 다 지나갔다. 모든 요구는 다 제하여 버렸다. 주님, 당신을 찬미합니다! 나는 이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그분께서 나의 좋고, 그름에 의거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언약에 근거를 두셨다. 우리가 그분과 언약을 세운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오셔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신 것이다. 할렐루야! 주님 당신을 찬미합니다!
2. 무지개를 빌어 언약을 세우시고 모든 책임을 담당하심
하나님께서 사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모든 책임을 담당하신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창9:13).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신 것은 그분께서 땅의 모든 생물과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즉 다시는 홍수로 땅의 있는 것을 멸하시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분께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고서 다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셨고 (창15:18), 그리고 야곱과 그의 맹세를 견고히 하셨으며 (창28:10.15), 또 이스라엘 백성과도 언약을 세우셨다 (창24:8).
오늘날 우리는 신약 가운데에 살고 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에 있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이렇게 선포하셨다. “나는 사람을 빌어 나의 뜻을 이루리라. 이 책임은 나의 어깨 위에 있고 사람의 어깨 위에 있지 않다” 이 언약은 그분께서 모든 책임을 지시겠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그분께서 능동적으로 언약을 세우시고, 책임을 지시는 시대에 있는 것으로 인하여 그분께 경배를 드린다. 이 언약은 바로 무지개이다. 이 무지개는 그분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그분께서 맹세하시고, 그분께서 모든 책임을 지시겠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우리는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오라! 오라! 오라! 우리가 다만 그분 앞에 나오기만 하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행하시고 싶으신 일들을 행하실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