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묵시가 없는 백성은 멸망하리라
ㅡ 하나님 앞에서의 봉사의 원칙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하나님을 만지고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봉사라는 일은 처음부터 있었다. 주님을 만지기만 하면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첫째로 생명을 중히 여기시고, 둘째는 봉사를 중요시 하신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두개의 큰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생명과 봉사이다. 창세기 앞 3장의 중점은 생명이다. 생명의 체험을 말한 후 생명의 공급이 넘치게 흐른다. 사람의 타락과 회복이 해결된 후, 이어 바로 4장과 5장에서는 봉사의 문제를 언급한다.
창세기 4장에서 보았던 봉사는 원칙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며 세칙(細則)은 아니다. 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이다. 아담과 하와는 두 형제 즉 가인과 아벨을 낳았는데, 하나는 농사 짓는 자이고, 하나는 양 치는 자이다. 제물을 드릴 때가 되었을 때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렸더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다. ‘열납하지 않음’의 원문은 ‘안 보다’이다. 이는 열납하지 않음보다 더 심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보시고 마음이 기뻐하셨으나 가인의 제물에 대해서는 보시지도 않으셨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 둘 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직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시지 않으셨다. 가인이 진정 잘못한 것인가? 그런 것 같지 않다. 가인은 잘못이 없을 뿐더러 그는 아마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때까지 하나님 말씀을 따라 일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르시되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食物)을 먹고] (창3:17,19) 사람이 타락한 이상, 무엇을 의지하여 생활할 수 있는가? 농사를 짓는 것이다. 당신이 농사를 하면 생활할 수 있다. 가인은 아주 성실하게 농사를 짓고 백 퍼센트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수고를 했을 것이다. 그는 일을 하면서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을 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 이렇게 하나님을 좇는 좋은 사람을 어디에 가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가인에게서 그 어떤 잘못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일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 뿐더러 자기가 수고한 성과를 하나님께 바치는 일도 그리 많지 않다.
아벨은 어떠 했는가? 아벨은 양을 쳤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양을 치라고 명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너는 양을 쳐야 식물을 먹을 수 있다”라고 말씀 하시지 않았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양을 치라’라고 말씀을 하신적이 없으셨다. 아벨이 정말 잘못한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으며, 또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못했는데 당신은 아벨이 무엇을 먹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는 태반 가인의 것을 먹었을 것이고, 가인은 아벨에게 무척 우호적이었을것이며, 동생의 생활의 필요를 돌보아 주었을 것이다. 아벨은 날마다 양을 치지만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가인에게 부탁을 했을 것이고 가인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제물을 드릴 때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드렸고, 가인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드렸다. 하나님은 아벨이 드리는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물은 보시지도 않으셨다. 이에 가인은 심히 분해서 하루는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지금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이 봉사인가를 알아 볼 것이다.
그는 분명히 묵시가 있는 사람임
묵시(중국어 성경에는 이상‘異象’으로 번역. 역자 주)가 없는 사람은 필시 봉사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아벨에게서 하나의 특징을 볼 수 있다ㅡ즉 그는 묵시가 있는 사람이다. 그의 묵시는 어디에서 얻은 것인가? 그의 묵시는 거의 그의 부모의 옷으로부터 얻었을 것이다. 그는 그의 부모가 가죽옷을 입은 것을 보면서 마음 속에 터득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ㅡ “나는 죄를 범한 사람이다. 나는 다시금 하나님과 친근할 수 없다. 만일 내가 하나님과 친근하려면 반드시 ‘피’를 통해서만 해야 할 것이다. 나의 생활은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에 근거하며, 나의 밖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 오늘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미 심판하셨고 ,사람을 저주하셨으며, 만일 하나님과 친근하려면 나는 반드시 하나님이 세우신 구속(救贖)에 따라야 할 것이다.” 아벨은 이러한 것을 봄으로서 묵시를 갖게 된 것이다. 이 묵시가 그의 생활에 영향을 주었고, 양 치는 자가 되게 한 것이다. 밖에서 볼 때 그가 양 치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위배한 것 같지만, 아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그에게 다른 생활을 하게 했던 것이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은 멸망함
묵시가 없는 그 어떤 봉사도 서 있을 수 없다. 잠언 29장 18절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말한다.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라는 말의 원문은 [백성은 멸망한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봉사에 있었어 이 말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히 행한다. 방자함이 바로 멸망이다. 우리가 봉사를 할 때 기억해야할 선결 조건은 하나님 앞에서 묵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묵시가 없으면 주님을 섬기는 것이 합당치 않을 뿐더러 주님을 섬길 수도 없을 것이다.우리는 날마다 분주함으로 인하여 묵시가 없었어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하고 있는 몇몇 일들만을 보고, 그 일들을 붙잡고 놔 주지 않으면서 곧잘 이렇게들 말한다.“오 이는 내가 봉사한 것들이고, 이는 내가 생명으로 이루었던 것들이고, 이는 나의 묵시의 모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묵시가 없다. 이러한 사람은 영적인 근시(近視)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오늘 사람들이 책임 형제가 되었어도 묵시가 없으면 모일 때에 서로가 이렇게 물을 것이다.“당신의 교회는 어떴소?” “좋소 현재 집회 인수가 백 십명으로 증가되었소” 이 모두가 묵시 없는 말이다. 이는 마치 우리의 삶이 ‘우리의 교회’만을 위한 것 같다. 묵시가 없다! 묵시가 없다! 묵시가 없으면 봉사도 없는 것이다. 어느 형제 자매(특히 자매)는 쉽게 이렇게 불평한다. “그들 모두가 내 말을 안 듣는다” “우리 교회는 너무 느슨하다. 자기 일들만 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설령 각자가 자신의 일들만을 위하지 않고, 모든 일들이 당신 손에 주어진다 하여도 혼란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묵시가 없기 때문이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멸망한다!] 우리는 봉사에 있었어 가장 큰 어려움은 우리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왜 봉사를 하는가? 당신의 봉사는 항상 머리가 아프면 머리를 치료하고, 발이 아프면 발을 치료한다. 또는 키가 자라면 짧은 바지를 색상이 맞던 맞지 않던 간에 아무 조각을 대어 꿰매서 기장을 대충 맟추어 입는다. 이는 묵시가 없는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셨다면 우리는 필시 소개 광고를 하지만, 그러나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도 하지 않는다. 어느 형제의 특징은 부담을 너무 쉽게 받아 그를 ‘부담 받는 전문가’로 칭한다. 그는 부담을 빨리 받기도 하고, 빨리 떨쳐 버리기도 한다. 오는 것도 빠르고 가는 것도 빠르다. 부담은 있지만 두 달 이상 지속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묵시가 없다. 묵시가 없는 사람은 이것을 보고 “아, 필요하다. 필요하다!”저것 보고 “아, 필요하다. 필요하다!” 하며, 모든 일에 부담을 갖는다. 이런 사람은 주님께 간구하여 매일 아침 그를 네 등분으로 잘라 각각 필요하는 곳에 갖다 대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묵시가 없으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모른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담과 사업을 위하여 일을 하고, 또한 전심 전력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장식한다. 그들이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억울하다고 할 것이다.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인가? 그들은 억울하다고 할 것이다. 그들이 시간을 드리지 않았다고 말할 것인가? 억울하다고 할 것이다. 그들은 충성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드림도 있다. 그러나 교회생활 가운데 건강한 모습을 나타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건축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는 묵시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실제가 되고 교회는 생활이 됨
묵시가 없으면 전체 봉사는 즉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인도(引導)에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동역에도 문제가 발생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개인마저도 모두가 다 방자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봉사에 우리의 묵시ㅡ그리스도가 실제가 되고, 교회는 생활이 됨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보았던 것에 의해 우리의 봉사를 헤아려야 할 것이다. 우리의 부담은 때때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에 있지 않고, 교회에 있지도 않다. 오히려 모처의 대학, 모처의 교회, 또는 자기가 소유한 것들을 위해 봉사를 한다. 당신은 일단 그 안으로 떨어지면 백성은 방자하게 된다. 봉사집회에서 서로 다투게 될 것이다. 고교생 봉사자는 고교생을 위해 쟁취할 것이고, 중학생 봉사자는 중학생을 위해 쟁취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봉사를 하면서 사람들과 늘 다투고, 자신의 봉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당신에게 묵시가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고, 품군의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만일 하나님의 긍휼로 말마암아 당신에게 품군의 느낌이 없고, 주님에 대해 충성을 다짐했다 하여도 당신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사람이어야한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첫째의 위치에 놓아야 한다. 당신은 이런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한다면 더 많이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을까? 교회에게 유익이 있을까? 만일 내가 저렇게 한다면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건가? 교회에 손상을 입히지 않는건가? 만일 내가 이렇게 봉사한다면 교회에게 무슨 보탬이 있는건가? 만일 내가 저렇게 봉사한다면 교회에게 어떤 피해를 입히게 되는건가?” 우리는 아직 이러한 묵시가 없기 때문에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 서로 고자질이나 하소연을 하게 된다 “주님, 보십시오. 어떤 형제는 내가 여러 해를 통해 양육한 사람들을 모두 다 끌어 갔습니다. 내가 몇해 동안 일구어 온 것들을 순식간에 모두 잃었습니다.”이러한 하소연은 묵시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청년집회를 갖고, 해방을 하면서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며 서로 간의 누림을 갖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묵시가 없는 것이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해진다. 일단 방자하게 되면 우리는 서로 누가 좋고, 누가 안 좋은가를 놓고 경쟁을 한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또한 교회를 위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 아직 우리 자신을 심하게 통제하는 것이 없다. 즉 우리에게 아직 우리의 모든 행동과 봉사를 적절히 통제하고 판단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봉사의 결과가 그리스도를 교회에게 더해 줄 수 있는가? 교회로 하여금 더욱 더 건축을 얻게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봉사의 가치는 높은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그 봉사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치가 없을 것이다.
우리 개인마다 묵시가 없을 때 필시 멸망할 것이다. 묵시가 없는 사람은 봉사의 끝에는 그 맛을 잃게 된다. 대학생 또는 중고생의 봉사를 막론하고, 묵시가 없으면 우리의 봉사는 끝에는 별 가치가 없게 될 것이다. 어느 날에는 피곤해서 죽고, 어느 날에는 환경의 변동으로 죽는다. 우리에게 청소년의 사역이 있었고, 특별집회가 있었으므로, 몇 백명의 사람들이 헌신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환경이 변하자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사역을 시작하자,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결혼 한 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묵시가 없는 봉사이다!
묵시가 그와 그의 생활을 통제함
그리스도인이 봉사를 잘 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하나의 묵시와 하나의 보았던 것이 있어야하며, 또한 이로 말미암아 그와 그의 생활이 통제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에게 연약함이 있는가? 당연히 있다. 그는 잘못이 있는가? 당연히 있다. 그는 실패를 하는가? 당연히 한다. 그는 하나님에게 득죄하고 교회에게 득죄하는 일들을 많이 하는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자신을 통제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는 ‘그가 가야할 곳’ ‘ 그가 해야할 일’ ‘그가 해야할 사역’‘그가 봉사를 통해 산출해야 할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사람은 그의 가치가 높고, 봉사의 가치도 따라서 높아진다. 가장 무서운 봉사는 많은 예배하는 사람들을 끌어오는 것이다. 봉사에 있었어 이 봉사보다 더 실패한 봉사는 없을 것이다. 만일 당신의 봉사가 사람을 그리스도 안으로, 영 안으로 그리고 주님께로 인도한 봉사라면, 설령 지금은 다른 사람과 같이 인수 (人數)에서 자랑할 수 없다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이 봉사했던 사람들이 모두가 당신과 같은 봉사에 의해 산출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부담은 결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하는냐에 있지 않다. 오늘날 우리의 부담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타내고, 교회의 건축에 있다. 때문에 봉사에 있었어 다만 양(量)만 있고, 질(質)이 없으면 안 된다. 질이 있으면 양이 있게 마련이다. 혹 양은 천천히 올지 모르지만, 그러나 양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봉사에 있었어 우리는 눈을 똑바로 떠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봉사는 교회의 건축과 주님을 나타냄으로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거주하실 곳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명확한 묵시이다. 일단 당신에게 이런 묵시가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변한 것을 발견 할 것이다. 당신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은 사람들이 즐겨 듣는 말씀을 전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담에 따라서 당신은 말씀을 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에 따라서 메시지를 해방할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 갖는 책임이 사람에게 갖는 책임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만일 교회를 위해서라면 나는 그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만일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나로 하여금 좋은 사람이 되라는 것도 마다하겠다. 나의 일언 일행, 일거수 일투족 모두 교회를 위해서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건축을 위하여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언행이 항상 무언가에 의해 통제 받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만일 사람이 오해하면 이는 그 사람의 일이다. 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한가?” 만일 유익하다면 나는 그 안에 머물 것이고, 만일 유익하지 않으면 나는 그 안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만일 교회에게 건축이 된다면 나는 생사를 불문하고 나 자신을 바칠 것이나, 그러나 교회에게 건축을 얻지 못하게 한다면 설령 나에게 그 어떠한 유익이 있어도 나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아주 강하게 빛비춰져서, 우리 자신을 통제하는 수준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우리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교회 건축을 위한 것이고, 직장을 다니는 것도 교회 건축을 위한 것이다. 훈련을 받는 것과 봉사하는 것도 교회 건축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생활도 교회 건축을 위한 것이고, 심방과 사람을 섬기는 것 또한 교회 건축을 위한 것이다. 교회 건축에 도움되지 않는 일에 우리는 참여하지 않는다. 만일 교회 건축에 유익한 일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헌신을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봉사는 강한 것이고, 높은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묵시가 있는 사람이 필요하심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구원을 받은 기간이 길거나 짧던 간에 항상 묵시가 있어야 한다. 묵시가 확실치 않으면 우리는 서 있을수 없고, 전투도 할 수 없으며 ,기껏해야 종교적인 일만 할 수 있을 뿐 진실한 사역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가인의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수고를 하였을 것이다. 틀림 없다. 그는 아우의 생활을 돌보아 주었을 것이다.그러나 만일 가인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그 잘못은 그에게 묵시가 없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가 그렇게 섬기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묵시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오늘날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묵시’이다. 만일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른다면 필시 고생을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있었어 우리에게 아주 강한 구원이 있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사람들을 섬길 때 사람들을 어디로 섬기고 갈 것인가를 항상 자신들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만 “할레루야, 이 집회는 정말 좋고, 주님의 축복이 있도다! 집회의 인수가 또 증가하였도다!” 라고만 말 할 수 없다. 인수의 증가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많은 단체의 인수는 우리보다 더 많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인가? 필시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가인으로부터 산출한 것에 불과하다.
묵시가 있는 사람은 그도 봉사를 하지만 밖의 성과만 보지않을 뿐만 아니라, 밖의 야단법석하는 것에 따라 흥분하지도 않는다. 그의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그가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2년 또는 3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이러한 느낌을 갖고 있을 것이다. “오늘 나는 여기서 사람들이 욕을 하던 칭찬을 하던, 또는 성공을 하던 실패를 하던 간에,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을 잘 알고 있다. 내 안에 하나의 청사진이 있기에 내가 어디로 가야하고,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를 알고 있다.” 만일 당신에게 이러한 것이 없다면, 어떻게 주님을 섬긴단 말인가? 어떻게 주님 앞에 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봉사의 가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오늘날 우리는 사람 얻는 일을 말한다. 다른 단체들도 사람 얻는 일을 말한다. 이 가운데에 차이점은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주목하는 것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은혜받게 하고, 구원시킨 후에 집회 참석, 재물 헌납 및 봉사 직분을 맡도록 한 것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하며, 또한 묵시가 있어야 할 것이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하다!’ 청년집회에 묵시가 없으면 청년집회는 앞으로 더 전진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교회에 묵시가 없으면 마찬가지로 교회도 앞으로 더 전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하시는 첫번째의 일은 바로 이‘묵시’를 갖게 하는 일이다. 우리는 반드시 묵시가 있었야 한다. 아벨의 특징은 바로 그가 하나의 묵시를 갖고 있었고, 그 묵시에 따라 하나님 앞에 살았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았음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역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산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자기가 무엇을 먹어야 할 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에 관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생활을 자신의 필요와 자신의 직업과 연결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는 정도로 발전한다.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필시 묵시가 있는 사람이다. 또한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필시 완전히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일 것이다.
아벨의 시대 때에 사람들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러나 아벨은 양을 쳤다. 양을 치다의 원문은 ‘새끼양을 치다’이다. 즉 양의 첫 새끼를 친다는 뜻이다. 새끼양은 오직 바치는 데에만 쓸 수 있고, 다른 쓸모는 없다. 그렇다면 아벨은 무엇을 먹었을까? 어떤 사람은 그가 우유를 마셨다고 한다. 이는 논리적으로 맞지가 않다. 그의 생활은 양과는 별 관계가 없다. 그의 생활은 완전히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기 위한 것이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이 맡은 사업, 설교 및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당신의 봉사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지가 않다. 봉사는 완전히 당신이란 ‘사람’에 근거한다! 당신이란 사람을 당신의 봉사가 증거할 수 있다. 당신은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마라! 당신이 허다한 일을 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소용없도다. 이는 가인의 원칙이다!”라고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헛수고로 돌아갈 것이다. 당신은 많은 일을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는 올바른 사람인고로 나의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아벨의 특징은 이렇다. 그는 완전히 하나님을 위한 사람이다. 그는 한평생 자기의 생활을 전혀 돌보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의 느낌도 개의치 않았다. 만일 아벨이 먹을 것을 가인에게 구걸하고 가인은 실로 화를 내며 주기를 싫어했다면 아벨은 부끄러웠을 것이다. 아벨의 삶은 사람 앞에서 별 가치가 없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는 그의 양심 가운데서 “비록 사람들은 나를 가치없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나의 생활은 백 퍼센트 하나님을 위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바로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다.
봉사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배를 위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자기를 위하는’사람은 봉사하는 사람이 아니다. 복음 전파하러 나아갈 때 고급차를 타지 않으면 일을 못하고, 밥을 먹지 않으면 일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섬길 수 있단 말인가?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교회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 한 무리의 사람들의 사역은 자신들을 위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이 주님을 위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은 사람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서 있다. 사람들이 그들을 가볍게 보고 이해를 못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굳건히 서 있다. 그들 안에는 있는 하나의 묵시는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이러한 인재들이야말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어떤사람은 대학 공부를 하면서 주님을 전적으로 섬길수 있다고 생각 한다. 그럴 수 없다. 세상에서 돈을 좀 벌면서 주님을 섬기려고 한다. 그럴 수 없다! 공부를 잘 하고, 돈을 벌려는 생각은 바로 당신 몸의‘혈루(血漏)’이다. 당신의 모든 생명을 다 새게 할 것이다! 당신이 주님을 전적으로 섬기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묵시가 있는 사람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없는 사람이 필요한 것을 보여주실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생활 속에 자기가 없을 뿐더러 느낌마저도 자기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봉사로 자신의 사욕을 만족시키지 않음
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그의 봉사로 자기의 사욕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오늘날 당신의 봉사
를 완전히 주님을 위하여 하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러나 당신의 봉사를 당신으로 하여금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아벨의 봉사에서 하나의 특징은 바로 그가 치는 새끼 양을 하나님께 바친 후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가 얻은 것은 바로 죽음 뿐이다. 그는 봉사 가운데 그 어떤 자기의 누림을 얻지 못했다.
하나님의 누림을 도둑질하지 말라
우리의 봉사에 있었어 가장 큰 어려움은 묵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봉사의 과정 중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누림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봉사에 있었어 우리는 적심과 기름부음의 체험들이 우리의 누림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라면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알아야할 것은 봉사하는 사람은 아주 쉽게 이러한 누림을 주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누림들은 나중에 주님을 좇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 만일 당신이 이런 봉사후에 오는 누림을 좋아하다면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칭찬하는 누림을 사랑할 것이다.
청년 형제자매들은 특히‘영적으로 성숙한 형제들로부터 칭찬받는 병’들이 있다. 그들은 영적으로 성숙한 형제들의 칭찬을 좋아한다. 만일 그들을 좋게 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슬퍼할 것이고, 만일 그들을 좋게 말하면 그들은 즉시 할레루야를 한다. 여러분들은 이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는 아주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봉사에 병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정상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갖고 있지 않다. 정상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좋게 말할 때 그는 듣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그를 칭찬할 때 그는 기뻐하지만, 그러나 그 칭찬은 그에게 그어떤 지위도,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정상적인 봉사가 있도록 인도하실 때에 당신에게 첫째는 반드시 묵시가 있었야하고, 둘째는 당신을 위하는 생활을 하지 말아야하고, 셋째는 자신의 영적인 누림을 찾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봉사하는 사람의 어려움은 바로 강단에서 메세지를 잘 전하고 나서, 즉시 자신도 모종의 누림을 얻고자 하는 것과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고자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칭찬을 받게 되면 즉시 그 칭찬을 그 자리에서 누리게 된다. 만일 사람의 칭찬을 자주 듣게 되면, 주님으로 부터의빛 비췸을 받는 기회가 줄어 들 것이다. 여러분은 결코 이러한 누림을 갈구 하지 말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주님이 주신 것으로 주님께 감사를 드리자. 그러나 당신 자신이 나서서 그것을 찾지 말라. 왜냐하면 이는 우리의 봉사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영적 봉사의 누림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또한 자기의 가치를 누림의 여부에 근거하여 측정하고 판단해서도 안된다.
사람을 너무 칭찬하지 말라. 또한 사람의 칭찬에 너무 주의하지 말라. 당신이 봉사를 할수록 당신이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보여진다는 것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시험이 많을 것이다. 언젠가 당신이 사람의 칭찬을 주의하거나 사람의 칭찬을 누릴 때에 당신은 즉시 당신의 봉사가 삼손의 머리카락이 깎임과 같이 능력이 사라지고, 자신이 아무것도 못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를 은헤로 대해 주시고, 환경과 우리 안에서의 빛 비췸을 통해, 계속 우리를 들추어 내시어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하자! 당신이 만족을 느끼고, 누림을 누리고 있을 때 즉시 하나님께서 당신을 채찍질 하실 것이다. 당신이 자신을 위해 ‘할렐루야’를 외치는 가치가 있다고 느낄 때 하나님은 다시금 당신을 채찍질 하실 것이다. 당신의 할렐루야의 소리가 클수록 하나님은 더 강하게 채찍질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오, 주여, 나는 원래부터 무능합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채찍질 하실 것이다. 당신이 진정으로 자신이 무능하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다시 축복하시고, 또 당신을 시험해 보실것이다. 당신이 축복을 받고, 다시금 자신을 좋게 생각하고 누리게 될 때,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채찍질 하실 것이다. 그런후에 당신은 또 다시 “주여, 나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나는 실로 쓸모없는 그릇입니다. 나는 실로 무능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들추어 내시는 방법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다른 예외는 없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당신을 좋게 말하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 다른 사람이 당신을 좋게 말한다면 당신은 주님의 손이 곧 임할 것이라는 것에 대비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봉사에 있었어 주님이 얻고자 하시는 것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항상 깨달아야할 것이다. 만일 봉사가 끝난 후에 우리 안에 기름부음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우리는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들은 그것을 결코 원하지 말아야하며, 얻으려고 하지도 말아야 한다. 또한 그 누림 가운데에 살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 아직 가야할 길은 멀고, 해야할 일도 많으며, 지불해야할 댓가도 많다. 이렇게 할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얻고자 하시는 것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께 책임지고 오직 교회를 위해 살아 감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준 누림에 대해 너무 즐거워하지 말라. 특히 강단에 서서 말하기를 훈련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당신이 강단에서 아주 유창하게 말을 전한 후, 혹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바로 이 칭찬을 갖다 누리게 되면 당신은 즉시 속임을 당한 것이다. 만일 주님의 손이 임하지 않으시면 당신은 교만하게 되고 파멸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 감사를 드리자!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영적인 것을 만져야 하는데, 그것은 봉사 가운데 자기의 만족과 누림을 주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때야만이 당신은 겸손하게 되며, 사람들과 쉽게 동역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을 어느 곳에 놓든 간에 생명을 흘러낼 수만 있다면 좋은 것이다. 어디에 있던 간에 당신은 생명을 흘러내야할 것이다. 첫째 줄, 둘째 줄, 또 셋째 줄에 앉으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어디에 앉던 할레루야를 못 하겠는가? 어디에 앉던 해방하면서 찬송과 기도를 못하겠는가? 왜 반드시 첫째 줄에 앉아야만 하는것인가? 책임 형제가 되어야만 강할 수 있는것인가? 책임 형제가 안 되면 셋째 줄에 앉고 영이 사라져야 하는 것인가? 만일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의 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아직 모종의 누림을 훔치고 있으며, 자신으로 하여금 봉사를 통하여 만족을 얻으려 한다.
아벨은 그렇지 않다. 당신은 아벨에게서 자신의 누림을 위한 것을 찾을 수가 없을것이다. 그가 새끼양을 치는 것은 오직 단순히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이다. 이외에 다른 요구와 기대는 없다. 그는 하나님이 만족하신것으로 만족한다. 우리에게도 하나의 새로운 인식이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우리가 이런 누림과 만족을 좋아하게 될 때 늘 우리를 이러한 기도로 우리 자신을 일깨워야 할 것이다. “오 주여. 저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저는 가야할 길이 멀고, 지불해야할 댓가도 많으며, 파쇄되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여, 저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저로 하여금 오직 단순히 당신만을 위해 책임지고, 단순히 교회를 위해 살게 하소서!”
진실한 봉사는 반드시 그를 죽게 함
당신이 봉사를 잘 할수록 당신은 더욱 빨리 죽을 것이다. 당신의 성장이 빠를수록 당신은 더욱 많이 죽을 것이다. 봉사의 결과는 죽음이다. 바로 당신 자신의 죽음이다. 봉사의 결과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느냐에 있지 않고, 당신 자신의 죽음에 있다. 당신에게 죽음의 체험이 있을수록 당신은 봉사 안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만일 당신에게 죽음이 없고, 다만 밖의 성과의 체험만 있다면, 이는 당신에게 아직 진실한 봉사가 없다는 것을 증거한다. 진실한 봉사는 반드시 당신을 죽게 한다. 다른 예외는 없다.
아벨은 그의 형에 의해 살해 당함
아벨은 첫번째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그의 결말은 실로 공허하다. 그의 결말은 바로 죽음이다. 가인-그 뜻은 얻음이고, 아벨-그 뜻은 공허이다. 아벨은 하나님을 섬기는 결말에 그의 형에 의해 살해됐다. 진정한 봉사는 우리의 상상함과 같지 않다. 젊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성숙한 형제들의 언변을 배우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영적으로 성숙한 형제들이 말을 할 때 그들은 젊은 사람들이 경험한바 없는 체험들을 갖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말할 수 있고 당신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 한 책임 형제가 집회의 인수가 줄어서 증가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매우 좋다. 그는 그의 말을 받쳐 주는 체험이 있다. 그러나 젊은 사람이 학교에서 막 봉사를 하거나 봉사를 배우러 나올 때에 그런 말을 할 단계는 아니다. 우리에게 봉사는 나로 죽임을 당하게 한다는 태도가 있어야할 것이다. 봉사를 할수록 나는 더욱 죽는 것이고, 봉사를 할수록 나는 더욱 사지(死地)에 넣어질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의 봉사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어떤 형제 자매들은 위축되어 있어 사역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또 어떤 형제 자매는 적극적이어서 열매를 쉽게 맺는다. 그 열매는 그를 죽게 하지 않고 오히려 살게 한다. 죽음
통과 없이 이르게 한 축복은 장래에 문제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만일 우리가 죽지 않고, 축복이 임하게 되면 장래에는 육체에 육체가 더하는 육체 덩어리가 될 것이다. 오히려 당신의 느낌이 이렇게 해도 좋지 않고, 저렇게 해도 좋지 않아서 억지로 당신으로 하여금 주님께 이렇게 말하도록 하게 할 것이다.“당신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을 찾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어째서 저에게 찾아오셨습니까? 제가 어떻게 당신에 의해 쓰임 받을 수 있습니까? 저는 당신이 사용하실 수 있는 곳이라곤 한 곳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만일 당신이 자주 이런 체험을 갖고 있다면 당신의 봉사는 필시 하나님께 보이게 될 것이다.
죽지 않으면 하나님이 사용할 수 없음
정상적인 봉사는 봉사를 할수록 우리를 더욱 죽게 만든다. 정상적인 봉사는 봉사를 하면 할수록 성과가 더욱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봉사를 잘 하고 못하고 간에 성과를 먼저 보는 것이 아니고, 먼저 당신이 죽었는지를 보아야할 것이다. 당신은 봉사를 통해서 당신을 조금 더 죽게 했는가? 당신은 봉사를 통해서 당신을 더 연약하게 했는가? 당신은 봉사를 통해서 당신을 더 무너뜨리게 했고, 죽음에 넣었는가? 당신은 봉사를 통해서 당신의 오기(傲氣), 자신(自信), 방법 및 재능 등을 더 내놓을 수 없게 했는가? 만일 실로 그렇다면, 이 봉사는 필시 좋은 것이지만, 만일 그러한 것이 없다면 장래에 반드시 문제가 있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죽음이 무엇인가 라는 것을 안다면 당신은 이러한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ㅡ내가 심혈을 기울인 것을 한 쪽에 놔두고, 내가 가장 출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을 한 쪽에 놔두고, 내가 제일 자신 있는 것을 한 쪽에 놔두며, 그리고 내가 최고의 축복으로 여기고 있는 것도 한 쪽에 놔두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죽음을 체험할 것이다. 진실된 봉사는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체험케 한다. 죽음이 많은 봉사일수록 하나님이 중히 보신다. 아벨은 하나님을 향해 매우 단순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그의 피가 땅에 흐르게 하셨다. 이때서야 만이 하나님께서 그를 진정으로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죽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실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가 죽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간증이 없을 것이고, 그가 죽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가 죽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신 것을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마음 깊은 속에서 무엇인가를 보아야할 것이다ㅡ “주 예수여, 지금 저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고, 더 깊은 죽음입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오늘날 내가 하나의 사역이나 하나의 봉사 앞에 나아갈 때 먼저 나 자신이 이 봉사를 통하여 얼마나 많이 죽을 수 있는지, 이 봉사를 통하여 나 자신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에 처할것인지를 생각해야할 것이다. 쉬운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쓸모가 없다. 대학생 봉사가 너무 힘들어서 중고생을 봉사하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쓸모가 없다. 중고생 봉사가 소용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내 말은 그러한 태도로 봉사를 한다는 것은 쓸모가 없다는 얘기다. “모 교회는 너무 어려워서 나는 다른 교회에 다닐것야!” 당신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형제가 나를 모 학교에 보내 사역하라 하셨는데, 나는 그것 보다도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좋아” 이렇게 말하는 당신은 무슨 쓸모가 있는가? 고르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 다 자기를 위함이다. 당신이 어찌 하나님의 손에 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죽음이란 공과를 어찌 안단 말인가? 우리가 함께 있을 때 서로 비교하는 것 마저도 죽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일 진정 죽었다면 누구와 비교할 수 있는가? 이미 죽은 사람이 누구와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살아 있고, 자기만을 위한 사람에게는 비교가 있는 것이다.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한 형제의 칭찬을 영원히 기억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 봉사를 배우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 오직 봉사가 어떤 결과를 가져 오는지를 기억하라! 그것은 죽음이다. 우리는 봉사를 할수록 우리를 더욱 죽게 만든다.
우리 안에 이러한 느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주여, 모든 봉사는 저를 죽게 합니다. 모든 봉사를 통하여 저를 죽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봉사를 할수록 저를 죽음 가운데로 인도하소서! ”이러한 느낌이 있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의 가치는 필시 높을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처음부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하자! 봉사 가운데 나 자신의 생활만을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의 누림을 위하지 않으며, 동시에 나의 결말은 오로지 죽음 뿐이다. 만일 당신이 이것을 보았다면 당신은 당신의 봉사와 관념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하게 될 것이며, 새로운 경지(境地)를 발견할 것이다.
진실한 봉사는 부활 가운데 있음
창세기 4장25절에서 아담이 다시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름은 셋이다. 그 뜻은 하나님이 내게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것이다. 때문에 셋과 아벨은 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 두 사람은 한 사람이다.
죽음에 놓인 후, 부활을 이끈 사람
여기에 이 사람은 묵시를 보고, 자기의 생활을 위하지 않았으며, 자기의 영적 누림도 갖지 않았으며, 결국은 죽음에 놓여졌다. 이는 바로 아벨이다. 우리의 첫 단계의 체험이다. 두번째 단계의 체험은 부활 가운데 있는 사람인 셋이다. 이 체험은 더욱 심각하다. 셋은 ‘지정, 세움’이란 뜻이다. 그는 지정된 사람이고, 세워진 사람이다.
실로 기묘하다! 시작에는 공허라는 아벨이 있었고, 이 공허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본 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았으며, 결국에 그는 죽음에 놓여졌다. 그러나 그가 죽음에 놓여진 후 그는 하나님께서 세운신 셋이 된 것이다. 이 사람이 변한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아주 큰 묵시를 보고, 그 후 그 묵시 가운데 살았고, 또한 그 묵시를 위해 살아갔다. 결국에는 그의 삶이 바로 이 묵시의 나타남이 된 것이다. 그는 다만 밖에서 수고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영적 누림을 갖지 않으려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죽음에 놓여진 사람이었고, 그는 자신있게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 나는 세움을 받았고, 나는 주님을 나타낼 수 있다. 주님과 나와는 완전한 연합이 있다. 내가 여기서 하는 일은 바로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며, 내가 여기서 하는 말은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말이며. 내가 여기서 하는 봉사는 바로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봉사이다. 주님과 나는 연합되어, 주님께서 내가 되고 내가 주님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가 권능을 갖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가 사람의 축복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집회하기 전 자주 주님 앞에 나아가 말한다 “주님, 우리의 약함을 면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으면 봉사를 통해 우리는 죽음으로 이끌려 갈 것이다. 이 때에, 우리는 하나의 기이한 일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에 있을 때 우리 안에서부터 한 사람인 셋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세워지고 부활한 자이다. 우리는 다시금 법죄 여부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고, 사역의 성공 여부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과의 깊은 연합이 이루어 진 것이다. 우리가 일어나서 말을 할 때 바로 하나님의 발표가 된다. 우리가 일을 할 때 바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 우리가 생명을 해방할 때 주님은 바로 우리에게서 완전한 흘러나타내심을 얻는다.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우리는 생명을 갖고 갈 뿐만 아니라, 동시에 권능도 함께 가져 간다. 우리는 생명이 있을 뿐만 아니라, 권능도 있는 사람들이다.
진실한 봉사는 반드시 죽음을 통과하여야 한다. 진실한 봉사는 반드시 부활을 이끌어 내야 한다. 당신이 봉사를 잘할수록 당신은 더욱 더 심하게 죽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심하게 죽을수록 당신은 더욱 더 부활이 있을 것이다. 아벨의 죽음이 없다면 셋의 탄생은 없을 것이다. 아벨의 죽음이 없다면 셋의 세움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벨이 죽으므로 셋의 세움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나는 공허에 인해 죽었다. 때문에 나는 세워진 자가 되었다. 나는 주님 앞에 일어나 주님을 찬미할 수 있다. 나는 세워진 자이다!
죽임에 합당한 사람
우리는 모두가 타락 가운데서 나와야 한다. 타락은 우리로 하여금 집회의 인수를 생각케 한다. 타락은 우리로 하여금 일하는 방법을 생각케 한다. 타락은 우리로 하여금 매일의 득실을 생각케 한다. 타락은 우리로 하여금 봉사를 하면서 자기를 사랑케 한다. 타락은 우리로 하여금 봉사를 하면서 영적 누림을 탐내게 한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이 필요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제거하시고 당신을 죽음에 놓는다. 당신은 죽음이 필요하다. 당신은 죽음을 얻어야한다. 당신의 하나님 앞에서의 가치는 무엇인가? 죽음이다! 당신의 하나님 앞에서의 체험은 무엇인가? 죽음이다! 이 죽음이 당신을 세운다. 이 죽음이 당신으로 하여금 권능을 갖게 한다. 이 죽음이 당신으로 하여금 주님과 하나의 연합을 있게 한다. 이 죽음이 당신으로 하여금 살아서 하나님을 대표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구원이 절실히 필요하며 처음 시작 때의 봉사, 즉 아벨의 봉사 안으로 이끌어 가야할 것이다. 우리를 봉사의 실제 안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 “주여, 나는 구원 받은 사람이 몇이든, 봉사가 많던 적던 간에 나는 다만 단순히 당신만을 바라봅니다. 나는 당신의 교회 건축을 위하여 완전히 통제된 묵시 가운데서 삽니다” 나의 생활 가운데서 나를 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의 생활 가운데서 나에게 누림이 될 영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나에 대한 평가는 오직 죽음이다! 나는 오직 죽기에 합당하다! 이 죽음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으로부터 나타나시기를 원하다. 이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나로 하여금 주님의 권능을 갖게 한다. 이는 마치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권능을 갖는 것과 같다. 혹 나의 봉사 가운데 어떤 특별한 은사가 없고, 또한 확연한 사역의 성과가 없다하더라도 우리가 교회 안에서 살아갈 때 교회는 축복을 입게 될 것이다. 교회는 나로 말마암아 하나님의 주권이 더 있게 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이 봉사의 노정은 그 누구도 변경할 수 없다. 만일 주님을 섬기려면 당신은 이 길을 가야할 것이다. 만일 주님을 섬기지 않으려면 당신은 돌아서라. 만일 아직 자신을 위해 계산하고, 자신을 위해 어떻게 하면 더욱 영적이고, 자신의 기능과 상태를 자랑하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돌아서기를 바란다. 당신은 쓸모 없다. 당신이 깨달아할 것은 “주님, 나는 죽기에 합당합니다. 나는 죽기에 합당합니다. ‘나’라는 사람을 봉사 가운데 살게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죽게하는 것입니다. 나는 공허한 아벨에 불과합니다. 나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당신 앞에 가져올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의 생활과 나의 사업은 오직‘새끼 양’을 당신에게 받치기 위함입니다. 나의 생활의 모든 부분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당신의 그 크신 능력과 지혜로 나를 죽음으로 이끌어 주옵시고, 세우신 셋, 부활한 셋으로 하여금 반드시 죽어야할 나에게 나타나시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