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스케치 - 제 4 장

4장

재 가운데서 일으키다

ㅡ 사람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

사람의 실패에 대하여 다시 말함

사람의 타락은 비록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하지 않음, 사욕의 미혹, 자기를 위함 및 위치를 지키지 않음, 이 네 가지의 원인과 관계가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끊어짐’ 즉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하지 않음이 모든 실패의 주요 원인이다. 하나님의 생명 안에 살지 않는다면 그 실행이 좋고 나쁘든 간에  모두가 실패이다. 당신은 당신이 실패 했는지, 안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완전히 당신이 당신의 일상 생활 또는 일과 중에서 하나님과의 연결 상태에 근거한다. 이는 당신이 겸손을 나타내는 것만으로 아니고, 사람의 환영을 받는 것으로도 아니며, 사람의 칭찬을 받는 것만으로도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생명과 끊어지면 가치가 없게 된다. 우리는 ‘선(善)’은 모두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의 선’은 더욱 더 좋은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집회’를 예로 들어 보면, 지금까지 집회가 좋지 않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생명 가운데 있지 않는 집회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타락이며 형편없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과 다름없다. 기억해야 할 것은 심판의 주님께서 세상을 심판 하시겠지만 그러나 수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 자에게도“내가 너를 도무지 인정하지 못하니” (마7:23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참조)라고 말할 것이다. 선(종교의 선을 포함)과 악과 지식은 하나님에  의해 같이 정죄되었다. 영화 배우가 사람에게 많은 이상한 환상들을 주는 것과 설교자가 사람 머리에 한껏 지식만 주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치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얼마나 애석하고 가련한가! 우리는 ‘좋음’을 미워하지 않는다. 특히 ‘종교의 좋음’에 대해 미워하는 느낌이 없다. 이는 우리가 ‘종교의 좋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당신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내가 바쁘게 청소년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그렇다. 생활이나 봉사를 막론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별 가치가 없다. 실로, 우리와 하나님의 생명과의 교제는 쉽게 이루어 질 수 있다. 로마서 8장 14절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성경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를 항상 인도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15절은 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하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에 잘 순종치 않으므로 종 노릇하는 느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무서워하며 ,주님 앞에 감히 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 속에 얼마나 연약하던지 얼마나 흑암이 있던지 그리고 얼마나 실패가 있던지 간에 당신이 받은 것은 아들의 영이다.

어느 때나 어떤 상황이든지 모두가 당신이 주님 앞으로 돌아올 때이고, 모두가 당신이 영 안에서 생명을 흡수하는 때이다. 영화를 보는 것이 무서운 일이 아니다. 그 과정 중에서 감히 주님을 부르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일이다. 이 말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대로 영화를 구경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당신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님과 친근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당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타락에 있던지 간에 기억해 두어야할 하나의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어느 때와 어느 장소에서나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고, 어느 때와 어느 장소에서나 당신이 영을 사용하여 찬송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즉 당신은 즉시 생명 안으로 돌아갈 수 있고, 주님과 연합할 수 있다. 만일 이런 인식이 없으면 당신은 영화를 보면 실패이고, 집회를 하면 실패가 아니고, 화를 내면 실패이고, 성경을 읽으면 실패가 아니라는 생각을 항상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화를 내거나 성경을 읽던지 간에 무릇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실패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사람의 실패의 원인이 그 근본의 관계,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교제가 끊어지고, 하나님의 생명과 끊어짐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람과 하나님의 교제가 일단 끊어지면 우리는 즉시 연약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연약하게 되면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된다. 뱀이 여인에게 말을 한 후, 창세기 3장 6절은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럼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바로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만족케 하는 표현이다. 사람의 타락은 언제나 소위 자신의 ‘혼’이 만족을 얻는 데서 나타난다. 이런 경우, 사욕(私慾)이 이끌려 나오게 되고 높이 올라가게 될 것이다. 사욕은 육체를 가져오게 한다. 많은 사물들을 죄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들의 방향은 주님을 목표 삼지 않고 있다.  만일 당신이 이런 일들을 따라 간다면 당신의 혼은 이끌림을 당하고, 자신의 사욕의 만족을 위해 즉시 타락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학생들은 “내가 90점을 받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라고 말한다. 문제는 당신이 이 90점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것으로 볼 때에 당신은 타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좋은 학생이라고 해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생각을 하지마라. 그렇지 않다. 좋은 학생이 되는 것이 나로 하여금 주님의 생명을 더 많이 얻게 하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90점 점수를 받아야 하고 대학에 진학을 하며 석,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서야 주님을 섬기기로 결정 한다면 그 모든 것이 당신의 실패와 타락의 원인이 될 것이다. 심지어 ‘성경’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어느 사람은 성경을 몇번이나 통독하고 온 뇌리에 지식으로 쌓아놓고서도 날마다 더 많은 성경 지식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마치 아편에 중독된 것과 같다. 성경을 읽는 것을 꼭 영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생명 안에 있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다 마찬가지다. 만일 성경을 읽는데 당신에게 영과 생명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치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당신은 왜 성경을 읽습니까?”하고 물으면, 만일 당신이 “설교를 위해서 또는 교회의 직분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위함이요, 실로 위험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의 관념을 한번 바꾸어 볼 수 있는가를 묻고 싶다. 사람이 강단에서 영이 없는 말씀을 전할 때 아래서 듣고 있는 당신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아야 할 것이다. 당신의 느낌의 깊이가 이 사람이 괜히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 모두가 이 같은 느낌을 갖는다면 우리의 집회의 상황은 필시 큰 변화가 있을 것이고, 해방될 것이며, 빠른 생명의 성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종교에 대해 곧잘 관용한다. 하지만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이 영과 생명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오직 누가 옳고, 그름을 볼 따름이다. 우리는 종교 안에 많은 심각한 일들, 예를 들면 의문이나 교리등에 관해서는 아주 잘도 인내한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안다면 당신은 그런 것들을 미워할 것이다. 교회가 건축과 성숙을 못하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고, (우리는 죄에 대해 고감도의 느낌을 갖고 있다.) 모두가 종교의 선, 종교의 지식인 것을 볼 수 있다. 교회가 건축을 못하는 것은 범죄하는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라 종교 가운데에 사는 형제 자매들이 많기 때문이다. 종교는 우리로 하여금 길을 못가게 한다. 우리는 죄악을 미워하는 것처럼 종교를 미워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실패의 원인은 사람이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서 있어야할 위치에서 떠나기만 하면, 우리는 바로 자기 위치에 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즉시 하나님의 면전에서 떠나가는 상황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많은 일들이 영 안에 있는 것 같고 옳은 것 같지만 그러나 우리가 서 있었야할 위치에 서 있지 않으면 끝내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사람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

사람은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의 실패에 대해 대응이 있으시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사람의 실패에 대응하는 네 가지 원칙을 보겠다. 이 대응의 원칙은 먼저 사람을 그 분의 영원한 뜻 가운데로 인도 하신다.

1. 사람을 다시 그분의 영원한 뜻 가운데로 인도함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분께서 첫째로 중히 여기시는 것은 그분의 뜻이지, 사람의 필요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우리를 회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이 화를 낸 후 바로 “오, 하나님이시여, 제가 화를 냈습니다. 저는 실패했습니다. 저는 연약합니다. 당신께서 저를 성질 가운데서 해방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하면, 그 때에 주님께서 당신에게 다가와“좋다, 내가 너를 성질 가운데서 해방해 주겠노라, 이렇게 하면 되었느냐?” 하고 물어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당신은 당신이 성질 가운데서 해방하고, 또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당신은 성질을 오늘의 당신의 묶임으로 보지 못한 것이다. 다음에는 ‘교회 안의 지위’도 당신의 묶임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은 다시금 주님께 “주여, 당신께서 저로 하여금 책임 형제가 되고 싶은 생각 가운데서 구출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드릴 때, 주님께서 “좋다, 나는 너를 해방하리라!”하고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다. 다음에는 ‘설교에 대한 탐닉’이 당신의 묶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또 다시“주여, 다시 한번 나를 설교의 애착 가운데서 해방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하게 될 것이고, 주님께서 “좋다, 내가 너를 구원하노라!”고 말씀하시게 되면, 이후는 또 무엇인가? 당신은 이제 화를 내지 않고, 교회 안에서 지위를 위해 다투지 않고, 설교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또한 교회 가운데서 단순한 작은 형제로 머무르는 것으로 모든 것이 잘 되었다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아니다. 잘 되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주님께서 다시 우리를 빛 비취어 우리로 하여금 ‘작은 형제가 됨’뒤에 숨어 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전적으로 우리의 문제와 연약함만을 처리하게 되면, 결국에는 우리 일생의 구원이 될 수 있는 체험은 결코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연약함을  처리하시는 데는 먼저 그분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서  하신다. 그분께서 우리들을 그분의 손 안에 놓은신 것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가를 보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무엇이 필요한가를 보고 싶으신것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어떻게 그분의 계획 가운데로 이끌려와 온전케 되는가를 보고 싶어 하신 것이지, 당신의 필요를 만족케 하는 것을 보시려는 것은 아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어떻게 그분의 필요를 만족케 해 드리는가를 보기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사람의 필요에 대응하시는 데에는 완전히 이 확실한 한마디의 말에 의거한다ㅡ 나는 하나님이다 !

우리는 자신과 봉사에 있었어 배워야할 한 가지 일이 있다. 그것은 단지 가서 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먼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보는 것을 배우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단지 하나의 어려움을 해결할 뿐만아니라, 사람을 하나님의 계획 안으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살 때에 어려움은 별것이 아니다. 모든 문제는 우리에게 제일 좋은 체험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를 성장과 성숙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우리는 이런 일들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I) 태초가 다시 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위해 다시 한번‘태초’가 있으시다. 그분은 그분의 계획에 따라 다시 한번의 시작을 열어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분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생물을 창조하신 후 실패했기 때문에 창세기에서 시작한 태초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께서 창조하신 사람도 실패했기에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태초’를 시작하신 것이다. 창세기 3장 8절은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은 실패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로 오신 것이다! 당신은 실패를 했어도 하나님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실패를 보시고 당신을 찾아 오신다! 사람들은 자기가 실패한 사람인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즉 자기가 ‘실패자’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설령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바올은 로마서 5장과 7장에서 각각 ‘아담 안에서 물려 받음’과 ‘육신 안에서의 제압’을 언급하였고, 특히 7장 24절에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하는 말을 하였다. 이 곤고는 무엇인가? 이 곤고는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 가운데 행하신 태초의 결과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이런 곤고를 체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 체험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매번의 실패는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성장이 있을 수 없다. 실패를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성장이 더 많을 것이다. 이는 형제 자매들로 하여금 실패하기를 장려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매번 실패 가운데서 하나님을 더 접촉하고, 다시 그분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실패한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은 쓸모가 없을 것이다. 혹 당신이 어는 기간에 많은 실패를 체험 했을지라도 “할레루야 좋다, 너무 좋도다!”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잘못 된 것이다. 날마다 영적인 생활을 사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그러나 만일 실패가 올 때에 (사실은 실패는 반드시 당신에게 온다) 실망하지 말고, 당신은 당신인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태초를 시작하게 하셔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보다 크시고, 당신보다 방법이 많으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신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에 자신이 있으시다! 매번의 영적인 성장은 원칙적으로 모두가 자신의 실패를 본 것에 근거한다.

당신의 느낌을 예로 말한다면, 내가 왜 이렇게 ‘느슨한가’ 하는 느낌은 바로 실패이다. 이 때에 무엇이 오는가? ‘단단한’것이 올 것이다. 만일 당신이 참으로 당신이 거짓이라는 것과 진실로 당신이 실패한 것을 느낀다면 ‘참’이 올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없음, 생명으로 부터 떠남, 자신을 위함,이익의 유혹을 받음, 서 있어야 할 위치에 서있지 않음 등등에 느낌이 있을 때 당신은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곧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너는 어디 있는냐?”하고 말씀하셨다. (창3: 9)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이다. 우리가 아담처럼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다. 자주 쉽게 선악지식나무의 실과를 먹으면서도 실패의 책임을 지지 않을려고 한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3:12).라고 말하거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3:13).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원래부터 실패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실패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방법이 있으시다. 하나님께서는 능히 대처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처하실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어느 하루를 서늘하게 하시고, 친히 당신에게로 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실 때에 즉시 당신이 숨긴 정황을 나타나게 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래도 실패를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해야하실 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당신이  실패와 연약을 느꼈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태초’의 일들을 당신에게 있게 하신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 ‘태초’는 우리를 낙담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더욱 주님을 따르게 할 것이다.

2)그분께서 ‘실패’의 사람을 빌어 원수를 대적함

기이하게도  창세기 3장 14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흙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는 원래 흙으로부터 나왔다. 15절에서는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한다. 여자의 후손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또한 우리들을 말하고 있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우리들을 떼어놓을 수 없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뱀에게 행한 하나의 선포가 있으시다.“타락한 사람이 여기에 있다. 너(뱀)로 인하여 타락했지만 나는 이 사람을 빌어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너를 파괴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응하는 방법은 매우 특별하시다. 당신이 화를 낸후 바로 일어나 이같이 선포해야 할 것이다.“성질아, 너의 권세는 어디에 있느냐?” 당신은 당신의 연약함을 하나님께서 매번 사탄의 도구를  깨뜨리시고, 부수는 기회로 삼고 계시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탄은 흙으로 창조된 사람을 유혹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종신토록 흙을 먹을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를 저주하셨지만, 그는 그후로 부터 모든 사람이 자기에 의해 먹힘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흐뭇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말씀하시길 “이 사람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너를 파괴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사용하여 원수를 대적하신다.

정말로 신기한 것은 우리가 원수를 대적함에 있어 우리의 흥분과 고무(鼓舞)에 있지 않고,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태초’의 체험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연약하고 실패할 때에 태초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을 만나므로 우리 속에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생명 능력이 생기게 되고, 원수를 대적할 수 있다. 이는 실로 사람을 기쁘게 한다. 우리는 빛 비췸을 받고 일어나 원수에게 선포해야 한다.“너는 내 발 아래에 있다. 너는 처리되었다!” 이것이 바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한 원칙이다.

당신은 늘 당신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생각하지 말고, 선포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당신이 선포할수록 당신은 더욱 빠른 성장을 할 것이다. 당신이 선포할수록 당신은 더욱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당신의 죄는 이미 사함 받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어찌하여 매번 주님께 달려가 죄를 자백하는가? 당신에게 당연히 청결한 양심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이 양심은 사탄의 고소에 대적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교제를 위한 것이다. 한번 실패는 한번의 죄에 대한 시인으로 주님과 담대히 교제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주 일어나 선포해야 한다“연약이여, 너의 권세는 어디에 있느냐?”이렇게 하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연약을 처리하실 때 당신에게 우유를 주거나 힘을 가하여 길을 가게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처리하시는 방법은 그것 보다 훨씬 높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나의 계획은 변치 않는다. 나는 네가 실패를 했다고 해서 너를 쓰지 않을 수 없다.  또 네가 실패를 했다고 해서 너를 파멸 시킬 수도 없다. 내가 너를 구원한 것은 너로 하여금 나의 뜻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너는 나의 손 안에서 영원히 떨어져 나갈 수 없다. 나는 너를 얻은 이상, 영원히 너를 얻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시 시작하여 당신을 얻고, 다시금 당신을 그분의 얼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하나님께 찬양하자!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히 변치 않으신다. 그분께서 사람의 실패를 빌어 사탄을 파괴 하신다고 선포하셨다. 하나님만이 이렇게 말씀 하실 수 있다. 사람은 실패를 하자마자 무너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다. 그분께서는 사람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영적인 전쟁은 매우 기묘하다. 기묘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실패를 통하여 사탄의 승리를 괴멸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성령의 법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생명 안에 살게 하시고, 교회 안에 살게 하신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초월하게 하시고, 사탄의 권세를 삼키게 하신다.  사탄이 우리에게 준 실패의 체험은 도리어 사탄이 수치를 당하는 근원이 되었다. 할레루야! 주님을 찬양하자!

2. 관리(管理)

창세기 3장 1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사람에게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절대로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당신이 이 말씀을 읽을 때 당신은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오, 하나님, 당신께서 손을 놓치 않으셨습니다! 만일 당신께서 손을 놓으셨더라면 나는 끝이 났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실패를 대응하실 때 원수 앞에서는 극도로 엄숙하고, 사람 앞에서는 지극히 긍휼하시다. 그분께서 사람에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나는 너를 잘 양육하겠지만, 그러나 너는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수 있다.” 이 말씀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길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연약하고 실패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면 돌볼 수 있는가도 잘 알고 계신다. 때로 당신은 “성질아, 너의 권세는 어디 있는냐?”라고 선포해야 한다. 얼마 후, 성질이 다시 왔을 때 당신은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관리가 바로 따라 오기 때문이다.

무엇이 관리인가? 관리는 우리 깊은 속 영적 직감하고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면, 밖의 득실에 따라 우리가 한 길을 선택했는데 그러나 우리 깊은 속에 있는 느낌은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느낌이 바로 하나님의 관리이시다. 하나님의 관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안에서 더 견고히, 더 쓰임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수 많은 관리가 있으시다. 아무렇게나 방종하는 사람들은 쓸모가 없을 것이다. 유독 관리하에 고난을 겪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손에 쓰이게 된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자! 우리가 하나님의 관리하에 있을수록 하나님의 필요를 더욱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주님을 따르는 길에 있어서 한면으로 당신의 영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것이고, 다른면으로는 이 자유가 관리를 산출할 것이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영의 자유가 관리를 산출하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자유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영이 자유할수록 더 강건하고, 하나님의 관리가 더 강할 것이다. 하나님의 관리가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우리의 전후,좌우 및 상하에 하나님의 손이 가득할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자! 하나님께서 이러한 관리를 통해 우리의 실패를 대응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소망하신 뜻 안으로 회복하신다. 하나님의 관리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있어서 별 쓸모가 없다. 또한 하나님의 관리를 알지만 하나님의 관리하에 있지 않은 사람도 쓸모가 없는 것은 만찬가지다. 하나님께서 한 면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통하여 사탄을 파괴하시고, 다른 면으로는 관리를 통하여 우리를 그분의 손에 더욱 쓰임받게 하신다.

3.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취하여 부활 가운데 살게 함

뱀이 흙을 먹는 다는 것은 매우 기이하다. 흙은 무엇인가? 흙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타락 후의 사람은 흙으로 변한 것이다. 사람이 흙으로 변한 후 사람의 가치는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사람에게 땅으로부터, 즉 흙으로부터 나오는 소산을 먹을 수 있다고 알려 주셨다.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 오늘날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사망에서 나오는 생명이지,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신 생명이 아니다. 당신은 어떻게 연약과 실패를 이길 수 있는가? 그것은 사람이 연약과 실패한 가운데서 생명을 산출하여 연약과 실패를 삼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활 생명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사람이 부활 생명 가운데 살수록 하나님 면전에서의 사람의 가치는 높아질 것이다. 사람이 부활 생명에 있을수록 모든 필요에 더 잘 대응 할 것이고, 하나님의 요구를 더욱 만족케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생명을 체험 할수록 우리는 더욱 더 풍성 할 것이다. 타락한 사람으로 부터 산출된 부활 생명이야 말로 하나님의 걸작이다.

4.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을 있게함

하나님께서 사람의 연약함을 처리하시는 네번째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대신 하여 짐승을 죽이시고,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에덴동산에서 그들을 내어 보내셨다 (창3:21, 23-24).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영적 의미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신는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을 너에게 입힐 것이며, 너에게 더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타락한 사람들이 일어나 원수를 대적하는 것이다. 사람을 타락케한 뿌리를 대적하라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관리와 부활의 생명을 주시었다. 끝으로 당신은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의 연합이 있는 것을 발견 할 것이다. 이 연합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덮음 아래에 있게 한다. 생명의 성장이 어느 정도에 이르면 주님과 깊은 연합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옷을 입은 후, 모든 수치는 완전히 제거 될 것이다. 당신이 이 옷을 입었다면,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 계시는 것과 당신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실패 한 후, 하나님께서 한걸음 한걸음씩 우리의 실패를 처리하시고, 결국에는 우리를 생명의 연합 안으로 회복하실 것이다.

우리는 매번의 실패를 통하여 적극적인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ㅡ 나의 이러한 실패는 나로 하여금 더 많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살게 한다! 나의 이러한 실패는 하나님께 또 한번의 기회를 드려서 나를 자랑으로 삼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리키고, 사탄에게 말씀하신다.“사탄아, 너는 사람들을 심하게 손상을 입혔지만, 그러나 나는 그들을 재 가운데서 일으킬 수 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쉽게 자포 자기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굳건히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기를 원하신다. “주여, 당신은 저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당신께서 저를 부르신 날부터 저는 당신의 것이었고, 오늘 날까지도 저는 완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제가 실패할 때 마다 당신께서 저에게 또 다른 [태초]를 주시었습니다. 저에게 많은 연약이 있다하여도 당신께서는 저에게 수 많은 태초를 주시었고, 저를 완전히 당신 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저는 사탄을 대적하는 당신의 그릇이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사탄이 저에게 안겨 준 실패를 통하여  그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수 많은 실패와 연약이 있는 ‘나’라는 사람을 통하여 사탄은 깨뜨려 질 것입니다!”

주님을 찬미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리를 주셨다. 실패 후에는 관리가 있다. 우리가 숨긴 실패에도 관리가 있다. 당신은 당신의 성질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관리가 있으시다. 당신은 당신의 ‘자아’ 마저도 아주 아름다운 사물로 여길 수가 있다. 이에 하나님께서 관리가 있으시다. 하나님은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이 누군인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관리하 실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연약함을 보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의 연약함은 당신으로 하여금 일어나 자랑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연약함이 당신으로 하여금 승리 가운데서 살게 하기 때문이다. 관리 이외에도 생명의 공급이 있다. 이 생명은 부활의 생명이다! 이 생명을 체험하면 당신을 더욱 더 전진하게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실패는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을 하게 한다. 당신은 하나님과 당신 사이에 거리가 있는 것으로 느껴왔지만, 그러나 실패를 통하여 당신을 하나님과 더욱 연합하게 한다. 연합은 점진적이고 상대적이다. 실패한 상황이 있을수록 은혜를 입을 수 있고, 더 깊게 주님과 연합할 수 있다. 자기의 실패가 보일수록 더욱 주님의 생명 안에서 살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일생의 역사는 실로 실패의 역사이다. 승리의 역사는 없을 것이다. 만일 사람이 감히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이시여, 저는 당신을 위해 무언가 또 했습니다!”라고 자랑하면서 말한다면, 그 자랑하는 말 자체가 실패이다. 구원 받은지 20년 또는 30년이 된 사람이 당신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다만 실패 뿐일 것이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이 실패한 사람은 실패할수록 더욱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실패할수록 승리할 것이고, 실패할수록 높아 질 것이고, 실패할수록 깊어 질 것이다! 우리의 일생은 아마도 이런 실패의 역사인지도 모르겠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그분의 면전에서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리면서 “주여, 당신을 찬미합니다. 저의 일생은 실패 뿐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있는 모든 것은 다 실패입니다. 그러나 이 실패를 통하여 저는 승리를 얻었고, 이 실패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 안으로 들어갑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당신을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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