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스케치 - 제 2 장

제2장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 만이 하나님을 만남

하나님의 생명의 공급

창세기 1장은 우리에게 생명의 성장 단계를 보여주고, 2장에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성장 체험 가운데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공급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2장에서 생명의 공급이 있어야 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성장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람에게 하나의 영을 주심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생기: 원문을 직역하면 생명의 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2: 7).  하나님은 생명의 공급에 있어서 최초이고, 최고로 귀중한 것은 생기를 사람의 코에 불어 넣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 하실 때 먼저 몸을 지으시고 ,그 다음에 생기를 사람 안에 불어 넣으셨다. 생명은 한줌의  기(氣)인데, 이 한줌의 기가 사람 안에 영이 있게 한 것이다.  영과 몸이 접촉하는 즉시 “혼”이 산출되었다.  “혼”은 성경에서 흔히 사람을 대표한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혼을 지으시지 않으셨다.  혼의 산출은 하나님께서 생기를 흙으로 지으신 몸에 불어 넣으신  결과이다.  성경은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창2: 7 원문을 새로 번역, 중국어 성경은 영이 있는 사람으로 번역).  그런즉 혼은 사람을 대표할 수도 있지만, 존재의 가치는 오히려 순전히 이 생기(생명의 기)ㅡ”영”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 26, 27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6절은 형상과 모양을 언급하고, 27절은 오직 형상만 언급하고, 모양에 대한 언급은 없다. 형상은 속 생명을 가리키고, 모양은 밖의 몸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밖에는 하나님의 모양,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이 과정을 기록할 때 밖의 모양에 대한 언급이 단 한번 뿐인 것은 그것이 그다지 별로 중요치 않다는 것과 중요한 것은 형상ㅡ 생명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이 보실때  우리의 가치는 우리의 영에 있다.  영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것이 의미가 없게 된다.  우리에게 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접촉할 수 있고, 우리에게 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얻을 수가 있으며, 우리에게 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영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가치는 짐승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의 공급으로 오시기 위해 첫번째로 우리에게 영을 만들어 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영을 근거로 삼으시어, 그분 앞에서의 우리의 가치를 인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여정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신 것을 보아야 하고, 귀히 여기신 것을 귀히 여겨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가치가 영과의 깊은 관계를 안다면, 우리는 영 이외의 세상 또는 종교에 속한 것과, 심지어 우리의 추구와 봉사를 포함한 많은 사물 (事務)들에 관심을 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영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생명나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을 공급하신 후, 곧바로 사람을 생명나무 앞에 두셨다.  이는 그분께서 자신을 사람의 실제로 공급하시기 위함이다.  그분께서 사람에게 영을 주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영 안에서 그분을 생명으로 받게 하려는 것이다.  오직 그분 자신만이 생명의 실재 이시다.  만일 그분께서 사람에게 요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이 생명나무의 달콤한 과실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은 영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풍성한 생명이 우리 가운데 아주 실제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오직 영만 있고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결함이 있는 것이다. 때로는 집회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해방하고 할렐루야를 소리 높여 외쳤지만  집회 후에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 당신은 이 집회가 좋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집회에 기쁨도 있었고, 해방도 있었으며 주님의 임재도 느꼈었다. 그렇다면 왜 만족을 느끼지 못 했을까?  그것은 하나님 생명의 공급이신 생명나무의 과실과 하나님 생명의 흐름이신 생수의 강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만일 집회 가운데 생명나무의 풍성한 공급과 생수의 강의 흐름이 있었다면 우리는 하늘에 속한 풍성 안으로 이끌릴 것이다.

어떤 형제들은 영이 강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도 풍성하므로, 그들이 일어서서 몇 마디 교통만 하더라도 사람에게 생명의 만족감과 빛 비춤을 주게 되며, 또한 우리의 피상(皮相)적인 상황의 나타냄을 느끼게 한다.  이때에 우리로 하여금  “주여, 나는 당신이 많이 필요합니다!” 라는 기도가 안으로부터 저절로 나오게 한다.  이것이 바로 풍성한 생명의 흘러 나타냄이다.  이 흘러 나타냄은 결코 사람의 비범한 구재(口才)로 인하지 않고 생명의 자연스러운 나타냄을 통하여 이루어 진다.  밖의 표현과 영적 용어의 사용에 개의치 않고, 또 어떤 자태를 취하거나 적절한 비유를 인용하는 것에 개의치 않으며, 다만 생명 풍성의 실제를 나타내므로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흘러 나타냄과 표현은 영 뿐만 아니라, 영 안에의 함축함과 영 안에의 주관적 체험도 포함한다.  이 영 안에의 풍성한 생명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열심히 추구해야 할 것이다.

생명강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 10).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 그 곳에서부터 이 강이 네 근원으로 갈라졌다.  이 네 강의 이름은 비손, 기혼, 힛데겔, 그리고 유브라데이다.

비손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 11~12).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인데  비손은 값없이 넘쳐 흐른다는 뜻이다.  생명의 성장은 생명강의 흐름에 근거한다. 이 흐름이 빠를수록 성장이 빠르다. 우리가 어떠한 환경 아래서도 생명을 흐르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생명 안에서 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를 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창2: 12 ).  베델리엄의 원문 bedolach은 성경에서 단 두번 사용했는데, 한번은 여기서 또 한번은 민수기 11장 7절에서다.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여기서의 진주는 만나와 연결되어 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온 후 광야에서 먹었던 음식이다. 생명이 흐를수록 음식이 더 많아지게 되고, 음식을 많이 먹을수록 변화가 더 있게 된다.  변화의 마지막에는 진주를 나오게 한다. 우리가 일단 배고픔을 느낄 때에는 생명의 흐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흐름이 있으면 만족이 있을 것이며 만족이 있으면 변화가 있게 된다.  이 변화는 자각적인 것이 아니며, 추구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며 생명의 흐름의 결과이다.

유의할 것은 이 네 강의 첫째 강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둘째 강은 사람에 대한 것이고, 세째 강은 사탄에 대한 것이며, 네째 강은 과실에 대한 것이다.  첫째 강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기에 이 강이 흘러 산출한 정금과 진주와 보석 이 세가지는 완전히 하나님의 필요를 만족하기 위함이다.  금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진주는 하나님의 구속(救贖)이며 호마노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 세가지는 바로 하나님께서 영세(永世) 가운데에 그분 자신의 거처를 건축하기 위한 재료이다.  이 세가지 재료는 어떻게 나온 것인가? 그것은 영을 통하여, 생명나무의 누림을 통하여, 생명강의 흐름을 통하여 나온 것이다.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들이 정금과 진주와 보석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영 뿐만 아니라, 생명나무의 누림과 생명강의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생수의 강의 흐름은 먼저 하나님의 필요를 위한 것이지, 우리의 필요를 위한 것은 아니다.  이 네 강은 우주 안에 모든 필요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첫째로 필요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 네 강이 흐르면서 먼저 하나님께 만족을 드려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필요가 다른 모든 것보다 높기 때문이다.  이 네 강을 네 개의 지역으로 상상하지 말라. 실제로 그들은 하나의 강인데 네 방면의 필요를 위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이 네 강을 볼 때 사람을 위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움직임을 볼 때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또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집회 가운데서 주님을 잘 누리고도 집회가 끝나자 마자 담배를  피운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들이 집회에서 단지 부르짖음만 한 건지 아니면 생명강을 진정으로 흘려 보내고 있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생명수의 흐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 안으로 흘러가게 할 것이다.  생명수는 흐를수록 우리 생명을 더욱 성장하게 할 것이다.  이 생명의 성장은 우리를  ’자아를 중심 삼음’에서 ‘하나님을 중심 삼음’으로 자라게 한다.  생명의 성장은 우리의 상상처럼 한발짝 한발짝 씩 오르면서 우리를 갈수록 영적이고, 갈수록 쓰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생명의 성장은 우리로 하여금 본래 자아를 중심 삼음에서 자신의 필요를 돌보지 않은 데까지 자라야 하고, 오직 하나님의 필요에만 관심을 갖고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야 할 것이다. 사람 중 “나는 구원이 필요 하고, 나는 기쁨이 필요 하며, 나는 은사가 필요하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외면(外面)에서 볼 때에 좋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위하는 사람이다.  생명강의 흐름은 우리의 성장이  자신을 위하는 것에서 완전히 하나님을 위할 때 까지 이르도록 한다.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우리의 행동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우리의 추구와 봉사와 수고가 완전히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 모든 것이 의미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러한 개념을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비록 단순하고,순수한 젊은이로 보일지라도 완전히 하나님을 위하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사람들이 대부분 생각하고 부러워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더 영적이고, 더 성장하고, 더 설교를 잘하고, 또는 형제 자매에게 도움을 줌으로서 형제들 가운데서 더 나타내려는 것뿐이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함이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첫째 강은 바로  “나”를  떠내려 보내는 것이다. 이 강이 흐를수록 “나”는 하나님 앞으로 흐르게 된다.  생명수에 의해 흘러 거처간 사람은 섬김과 봉사와 동력을 하지만 그의 원천은 “나”를 중심 삼음에서 “하나님”을 중심 삼음으로 바꾸어진 것이다.  왜 사람들이 봉사하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봉사하기 때문이다.  왜 생명을 흘러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생명을 흘러내시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로 공급만을 위한 공급은 하지 않는다. 또 설교만을 위한 설교도 하지 않는다.  나의 생활의 중심은 완전히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 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지않은 그 어떤 것도 나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여기에 100개의 학교가 있다고 해서 100개의 학교에 모두 가서 사역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계속 구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하나님 당신께서 얻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오는 한 해는 나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다만 너희들이 필요하다.”라고 말씀 하신다면, 우리는 필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며, 모든 일들을 다 떨쳐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律)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운동을 있게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외모만 보기 좋고,실제로는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노예같이 일을 시켜 과다한 소모를 하게 하지는 않을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균형적이시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치 않다.   우리 가운데 이 생명강의 흐름이 오직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는 것을 필요로 하고, 명령하신 것만을 준행하는 정도로 흘러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삼고,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되심을 체험할 것이다.  이 때에 비로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완전한 주권을 얻게 되시고, 완전한 공급도 있게 되실 것이며, 우리의 생명을 성숙하게 하실 것이다.

기혼 강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창2: 13 ).  둘째 강 기혼은   물이 많아 흘러 넘침을 뜻한다.  기혼 강은  “구스”를 거치는 데, 이 구스는 변할 수 없는 검은 얼굴을 가리킨다.  하나님께 감사 드리자, 이 생명강의 흐름으로 우리를 변화와 성장케 한다. 그러나 이 변화는 우리가 상상한 것과 같이 않다.  우리가 구원 받고 일정한 추구와 성장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온유와 겸손하게 변하게 되고, 위안을 받을 수 있고, 또 사람을 위안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주 예수님의 본은 그렇지 않다. 주 예수님의 온유는 당신이 상상한 온유가 아니다.  주 예수님의 겸손도 당신이 상상한 겸손이 아니다.  그분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신 것은(요2: 15) 성전을 정결케 하기 위함이다. 그분은 종교 적인 온유한 사람이 아니다. 생명강의 흐름이 가져온 변화와 성장이야 말로 우리의 영을 풍성케 하고 자유롭게 한다.  내가 성장할수록 영은 더 자유로워 지고, 주님의 생명은 더욱 풍성할 것이다.  생명강의 흐름은 나쁜 옛 창조를 씻어 낼 뿐만 아니라, 종교 안에 좋은 것 마저도 함께 씻어 낸다.

힛데겔강과 유브라데강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 14).  세째 강 힛데겔은  빠르고 큰 능력을 가졌음을 뜻한다.  힛데겔강은 앗수르를 향해 흐른다 (다비 번역본). 앗수르는 세상을 가리키고, 사탄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하나의 강이 있는데 이는 매우 강하므로 사탄의 나라로 흘러 들어가 그를 직접 대적한다.  우리가 첫째와 둘째 강의 흐름 안에 살수록 사람들을 이 세상의 묶임 가운데서 구원시킬 수 있는 능력을 더욱 갖게 되고, 이 시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가 영안에 거하기만 하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또 그들에게 빛 비췸을 줄 것이다.  영 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의 간증을 나타내는데, 이 간증은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사탄의 권세도 그 곳에서 소멸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이러한 사람들은 달콤한 과실을 산출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네째 강인 유브라데 강이다.  ‘유브라데’는 달콤하고 견고하며 비옥하게 함이란 뜻이다.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이 다 만족을 얻는다.

우리는 이 네 개의 강을 유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의 원칙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생명은 반드시 흘러나가야 한다는 것이며, 흐름이 적을수록 생명이 둔하게 되고, 흐름이 많을수록 생명이 활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을 모르면 생명의 성장은 어렵다.  간증을 담대히 하는 사람은 간증을 하기 싫거나 용기가 없는 사람보다도 성장이 빠르다. 우리는 생활 가운데 있거나, 집회를 하든지 간에 생명을 흘러 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더 많은 생명이 흘러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수시로 우리의 영을 훈련해야 하고, 수시로 영 안에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수시로  “영이 있는가?”를 자문(自問)하고, 이에 강하고 긍정적으로 “있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옷을 입을 때에도 영이 있어야 하고, 버스를 기다릴 때에도 영이 있어야 하며, 심지어 밥을 먹을 때에도 영이 있어야 한다.  긍정적이고 강해야 하며, 해방도 해야 한다.  작년의 영도 안되고, 어제의 영이어서도 안 된다. 우리 안에 있는 영은 항상 신선하고,  흘러내야만 한다.  이것이 생명 성장의 비결이다.

배필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 18, 21~24). 이 단락의 말씀은 생명의 합일(合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배필의 원문은 '복사' 또는 '서로 닮음'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노년 부부가 장기간 생명과 교통을 나누다 보면 그들의 얼굴 모양과 성격 및 생명까지도 닮게 된다. 사람들이 그들을 보는 즉시 그들이 부부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후 여러 동물들을 사람에게로 이끌어 오시어 그의 도움이 되거나 그의 배필이 될 수 있는가를 살펴 보았지만 결국 이 많은 동물 중에 그 어느 하나 아담과 닮은 것이 없었고, 또 그 어느 하나 아담의 배필이 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담은 다만 모든 공중의 새와 들의 짐승과 육축에게 이름을 주었을 뿐 그들 가운데 그의 배필이 될 수 있는 그 어떠한 것도 찾지는 못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 18).  여기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예표하고 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만유의 주이시지만, 그러나 그분의 배필로서 교회가 없다면 그분께서는 독처하게 되신다.  그분께서 교회를 얻으셔야만이 만족하실 수가 있다. 오늘 날 우리는 또 다른 각도ㅡ생명 성장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생명의 성장이 마지막에 이를 때에 하나님과 생명의 합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모든 것은 생명의 성장 안에 놓아 둘 수 없다. 죄악과 세상은 물론이거니와 신학 교훈과 성경 지식 그리고 이전의 모든 영적인 체험마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생명 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과 어울리고 하나님을 만족하게 한다.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그의 옆구리를 열어 무었인가를 끄집어 내셔서 (중국어는 갈빗대로 번역, 히브리어는 “가장자리” 또는 “모퉁이”의 뜻임) 여자를 만드셨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다.  아담이 그 여자를 보고 말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2: 23).라는 뜻을 살펴보면, 하와와 아담은 완전히 어울린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한 생명의 성장은 마지막에 있어서 하나님과 완전한 합일을 이루게 된다.  여기에는 그 무엇도 우리를 만족하게 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수 없다.  세상 만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지만 아무것도 우리와 어울리는 것이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 줄 수 있다.  그런 후 그들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 여기 너무 많은 것들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혹 “이건 너의 앞 날이야”,  “이건 너의 학위이야”,  “이건 너의 사업이야”,  “이건 너의 돈이야” 라는 것들에 대해 모두 다 “필요 없다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 만물을 알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이 만물을 다스리고 사용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배필로 맞이하지 않는다.

아담은 실로 총명하고 노련하다.  그는 그의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나는 새와 기는 짐승들이 아름답거나 못생겼던 간에 나는 것과 걷는 것, 달리는 것과 뛰는 것, 큰 것과 작은 것을 막론하고 그는 다만 이름을 주고, 그들을  그대로 두었다.  예를 들면, 한 마리 공작새가 아담 앞에 이끌려 왔을 때 그는 즉시 “이것은 공작새다”라 말하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공작새에게 이름을 주지 않고, 도리어 먼저 공작새의 부리와 공작새의 깃털을 보았을 것이고, 공작새가 깃털을 펼칠 때의 아름다움을 기이하게 여기며 “음, 연구 가치가 있겠구먼, 한 4년 정도 연구 해보세!”라고 말 할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4년이란 세월을 허비하게 된다. 혹, 오늘 “사업”이 우리 앞에 나타나면, 우리는 바로 “이는 나의 사업이다”라고 말하지 않겠지만, 그것을 한 쪽에 놓고 사용할 것이다. 우리는 “오, 이는 나의 인생의 소망이요, 나의 앞날이로다. 내가 살아가노라면 열심히 사업을 경영해야지, 이는 나의 길이로다! ”라고 말 할 것이다.  만일 아담이 그의 앞에 이끌려 나온 한 마리의 코끼리를 보고 “오, 이 거대한 물체에는 기인한 코가 있고 건장하고 힘있는 다리가 있는 고로 연구의 가치가 있다. 먼저 그를 배필로 맞이한 후에 연구토록 하자!” 는 말을 했더라면 이는 참으로 가련하고,불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애석하게도 이와 같이 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코끼리를 배필로 맞이하여 몇 해를 함께 수반하다가 헛된 것을 발견하고 결국 손을 놓게 된다.  우리는 계속 배필을 맞이하고 있는 데 맞이한 그 결과는 늘 잘못된 것이다. 정말 가련하다.

오늘 우리에게 당면한 많은 어려움은 밖에 세상의 미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영적인 사물 또는 체험이 우리의 배필이 되었다는 데 있다.  ‘기도로 말씀 읽기’를 예(例)로 들면 ‘기도로 말씀 읽기’는 우리가 조석(朝夕)으로 사용한 준마(駿馬)와도 같은 아주 아름다운 동물과도 같을 수 있다.  수반하는 것은 괜찮지만 그러나 “기도로 말씀 읽기는 나의 주님이오, 나의 배필이요”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기도로 말씀 읽기’가 명명(命名)된 후 우리의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우리 일생의 의지(依支)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우리의 필요는 이런 사물에 있지 않다. 우리의 필요는 완전히 하나님의 생명이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과 완전한 합일에 도달할 때까지 성장이 필요하다. 100퍼센트 하나님으로서 나오지 않은 생명은 받을 수가 없다.

창세기 1, 2장에는 지식과 도리(道理)는 그다지 많지 않다. 여기에 오직 하나의 부담이 있다. 그것은 생명이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에 성장이 없다면 실재가 없을 뿐더러, 모든 영적 생활은 말하기 만으로 끝이 날 것이다.  제1장에서 우리는 엿새 간의 생명 성장을 보았는 데, 그것은 성도의 여섯 단계의 체험이다.  제2장에서는  우리가 생명 성장할 때 주님께서 주신 네 가지 풍성한 공급이 있는 데 그것은 영, 생명나무, 생명강 그리고 그분 자신이다.  우리들은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성숙될때 우리는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73: 25).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물을 알고, 모든 사물을 감상하며, 모든 사물을 사용하지만, 그러나 이 모든 사물은 다만 우리의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창2: 15) 아래에 두었을 뿐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을 위하고, 완전히 하나님께 향하고, 완전히 하나님의 생명 안에 살고, 완전히 하나님과  합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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